그 날은 가을 햇빛이 유난히 맑은 10월의 일요일이었다. 서울 변두리 주택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건너 집 담장에서 지켜본 탈주범 지강헌의 최후 모습은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담배를 꼬나문 채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던 적의 가득한 그의 눈빛, 창틀을 부여잡고 방향없이 폭포처럼 쏟아내던 절규, “사랑 받고 싶었다” “생명이 몇 시간이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따사로운 햇빛을 받고 싶다”는 등…, 그리고 유리조각으로 목을 긋기 전 세상 모두를 향해 조롱하듯 날린 그 섬뜩한 미소까지.
▦ 무엇보다 귓가에 선연한 것은 팝송 ‘홀리데이’의 애잔한 선율이다(왜 자꾸 스콜피온즈의 동명곡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분명 비지스의 노래였는데도). 지강헌은 경찰에 요구해 받은 그 테이프를 방안 카세트에 꽂고는 한껏 볼륨을 올렸다. 그리고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따라 불렀다.
유리조각으로 자해하고, 순간 뛰어든 경찰 대테러요원들의 총탄을 맞은 것은 그 직후였다. 한물 갔던 사랑노래 ‘홀리데이’는 이후 비장감이 얹혀지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몇 년 전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도 주제곡으로 쓰였을 정도로.
▦ 이후 지강헌은 신화가 됐다. 마치 훗날 노추(老醜)를 드러내기 전의 대도 조세형처럼. 사람들은 그의 처절한 모습과 드라마틱한 사건 결말을 TV생중계로 지켜보면서 그가 강도, 강간 등 전과 13범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탈주 중의 강도 행각들은 그가 인질로 붙잡은 가족들에게 ‘베푼’ 뜻밖의 인간적 대우에 묻혔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교도소나 재판정 주변에서 흔히 운위돼온, 그리고 사실은 현장에서 동료 탈주범 강영일이 내뱉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저작권’도 의심 없이 그에게 부여됐다.
▦ 새삼 당시를 떠올린 것은 최근 개봉한 영화 ‘홀리데이’나, 그 상영관을 둘러싼 잡음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법조브로커 윤상림 사건이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알량한 돈과 권력을 이리저리 엮어 세상을 멋대로 재단해온 윤씨와 주변인물들의 행태에서다.
실제로 애매한 이에게 억지로 죄를 씌우려 한 정황까지 드러나고 있으니, 반대의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을지. 과연 우리는 지강헌 등이 절규하던 그 때로부터 얼마나 나아온 것일까. 문제는 그를 다시 추억하고 비틀린 의미를 부여하게끔 하는, 여전한 사회 현실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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