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이래, 흡혈귀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몇 가지 인간 정념에 관한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작용해 왔다. 흡혈에서 암시되는 에로틱한 욕망의 제스처나 살인 충동 등은 영화 감독이라면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역사 100년을 통틀어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는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다. 그 중 내가 얘기하려고 하는 작품은 1995년에 제작된 영화 ‘어딕션(Addiction)'이다. 이 작품은 여태껏 내가 본 흡혈귀 영화 중 가장 독특하면서도 지루하고, 시시한 듯 의미 심장한 영화 중에 하나로 분류된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미국 B급 영화의 독보적인 존재 아벨 페라라이다.
‘복수의 립스틱’, ‘스네이크 아이’, ‘퓨너럴’ 등 독특한 느낌의 갱스터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아벨 페라라는 우리나라에선 일부 마니아들에게나 편협한 지지를 얻고 있을 뿐, 일반 대중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갱 영화들은 ‘대부’시리즈나 마틴 스코시즈의 강렬한 영상만큼 역동적이지도 않고 극적인 전개 또한 미흡하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에 한번 ‘중독’된 사람은 한없이 지루하고 음침하기까지 한 그의 영상의 유혹으로부터 쉬이 벗어나기 힘들다.
앞서 독특하면서도 지루하고, 시시란 듯 의미 심장한 영화라고 말했듯 아벨 페라라의 ‘어딕션’은 굉장히 나른하고 재미없는 영화에 속한다. 흡혈귀 영화라고 해서 미녀의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진홍빛 선혈을 기대했다가는 단번에 실망하게 된다. 스토리 또한 단순 명료하면서도 싱겁다.
한 철학 전공 여자 대학원생이 우연히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고 흡혈귀가 된다. 그러면서 도시 전체가 흡혈귀들의 난장으로 변한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뭐, 이런 내용인 것이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처럼 끝내주게 잘 생긴 흡혈귀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처럼 시공을 넘나드는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같이 비디오를 보던 친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온갖 욕지거리를 입에 담을 정도였다(그러면서도 끝까지 영활 다 보는 그 친구의 인내력에 존경을!).
그 만큼 이 영화는 사람의 인내력을 실험하는 요소가 다분하다. 거기다가 웬 뜬금없는 철학적 장광설이라니. B급 영화의 작가주의라느니, 폭력으로 명상하는 갱스터 영화의 타르코프스키라느니 하는 이상한 칭송을 받는 감독의 작품인 만큼 뭔가 있겠거니 하고 봤다가는 그냥 짜증만 내고 말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그런 영활 두고 도대체 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걸까?
문득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따지고 보면 이 영화의 형식과 주제 자체가 흡혈귀의 속성을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게 아닌가 싶다. 정말 징그럽고 역겹고 불쾌한 것이 내 몸을 사악 스쳐가면서 오래도록 몸 안에 정체불명의 감염체를 이식시켜놓는 것.
그러니까 ‘어딕션’에 대해 주저리 늘어놓는 이 글은 흡혈귀에 감염된 내가 이 글을 읽는 이들을 또 다른 흡혈귀로 만들려고 하는 흡혈귀의 생존법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오버했다면 용서하시라.
이 영화에서 피는 검은 색으로 처리된다. 흑백으로 촬영했으니 당연하지 않느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는데, 문제는 그게 단지 화면 색상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어딕션’을 색조로 비유하자면 단연 검은색이다. 피도 검고 뉴욕의 밤거리로 검은색 투성이고, 무슨 현존하는 뱀파이어 협회 뉴욕 지부장처럼 나오는 크리스토퍼 워큰 역시 인간의 검은 욕망과 광기를 표상한다. 이쯤 말했으면 이 영화의 질감과 톤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듯하다. 요약하자면, ‘어딕션’은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노골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민 영화라 할 수 있다.
흡혈귀 영화의 고전으로 추앙 받는 무르나우 감독의 ‘노스페라투’는 극명한 빛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검은 욕망을 현란한 투시법으로 태양 아래 노출시킨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소위 표현주의 영화의 교과서적인 빛의 분할과 극적인 사운드 효과를 선보였다. 그러나 ‘어딕션’은 똑같은 흑백이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이다.
‘어딕션’은 뉴욕이라는 현재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도시적 현란함이나 세련된 풍속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침침하기만 한 카메라는 싸구려 껌을 씹듯 랩송을 주절거리는 흑인 건달들이나 주정뱅이 부랑자들이 어슬렁거리는 뒷골목 풍경을 줄창 좇는다.
때문에 주인공 캐슬린의 학교 장면 등 여타의 낮 풍경마저도 한없이 우중충하고 불결해 보인다. 아무리 피에 관한 영화, 악에 관한 영화, 육체를 마비시키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중독’(이 영화를 관통하는 아벨 페라라의 코기토는 ‘나는 중독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에 대해 성찰하는 영화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 痼?정도로 뻑뻑한 어둠이 시종일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한 편 보고 나면 다시는 이 사람 영화 안 봐야지 하다가도 이상한 주술에 끌리듯 다른 작품 목록을 뒤적이게 만드는 감독의 작품인 만큼 그런 건 어느 정도 감수했던 부분이긴 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아벨 페라라는 내게 자신의 영화를 무려 다섯 편이나 보게 만들었으니까. 그 정도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감독 축에 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아직 그를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는 흡혈귀 같다.
아닌게아니라, 아벨 페라라 감독이 그 자체로 흡혈귀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게는 요지부동하는 편견이다. 그의 영화는 도시의 어둠과 공포, 삶과 죽음이 쌍생아로 맞붙은 인간의 원시적인 정념,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구원에의 원망(그의 영화엔 지독한 가톨릭적 원죄관념이 물씬 배어있다)이 반어적인 신성(神聖)으로 짙게 물들어 있다.
그러니까 그는 죄악의 근원인 이 세상 자체, 세속적 인간의 원형을 흡혈귀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뉴욕이 대도시라기보다는 무슨 야수들의 동굴처럼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딕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흡혈귀로 변해 버린 인간들이 흡혈의 난장 파티를 벌이는 장면을 지옥도로 변해버린 세상 자체에 대한 노골적인 우화라고 봐도, 일단은 무방하다.
하지만 아벨 페라라의 복잡한 심상은 그런 단선적인 고발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영화를 만드는 궁극엔 악마의 방식으로 현대의 신을 실험하는 음험하고도 거창한 욕망이 숨어 있는 듯하다.
만사에 달통하고 세속에 찌들어 짜증과 달관이 미묘하게 뒤섞인 고참 뱀파이어 크리스토퍼 워큰은 그러므로 세속이라는 영혼의 땅굴 속에서 번거로운 영생을 소진(될 리 만무하지만!)시키는 신의 얼굴을 그대로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신은 인간의 피를 먹고 사는 것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 영화에서는 니체가 자주 언급된다. 세속의 넝마를 뒤집어 쓴 이 시대의 위대한 신. 그러나 그의 주식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버린 상태다. 그럼에도 그가 죽음의 육체로 여전히 살아있는 까닭은 거듭되는 인간들의 역사에서 갖은 악덕으로 양념이 된 핏줄기가 쉼 없이 유전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 자체의 처녀성이다. 따라서 흡혈귀는 반어적인 존재다. 그는 처녀의 피를 갈구하지만, 세속엔 더 이상 처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반대로 처녀들에게 흡혈귀는 존재의 전면적인 변형을 불러일으키는 공포의 대상이다). 이미 모든 인간이 흡혈귀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흡혈귀는 그래서 외롭게 흡혈귀들의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낸다. 모든 가짜 흡혈귀들이 자신에게 그 지고한 병증과 고뇌 어린 영생을 물려달라는 원망으로 자신을 못 박아 버릴까봐?! ‘어딕션’은 그렇듯 가련한 거지로 전락한 신에게 보내는 참혹한 연민을 담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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