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나를 공룡박사라 부른다. 어떻게 그런 재미난 공부를 하게 되었느냐, 언제부터 공룡에 관심을 가졌냐, 공룡학자가 되려면 무슨 공부를 해야 되느냐 등이 흔히 받는 질문들이다. 이러한 질문들의 모범 정답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룡에 관심이 많았지요. 공룡은 나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답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그들의 기대를 한참 벗어난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공부를 천성적으로 좋아서 하는 수재 타입의 학생은 아니었다. 나는 공룡의 ‘공’자도 몰랐으며 더구나 공룡에 관심도 없었다. 이는 내가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도 서점에는 공룡에 관한 변변한 책 한 권 없었고 공룡은 머나먼 남의 나라 얘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특별히 공룡과 관계되어 기억나는 일도 없고 중학교 시절에도 이렇다 할 자랑거리도 없는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가장 친한 두 친구가 이과를 선택해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이과를 택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떤 대학을 가서 어떤 전공을 택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따라서 남들처럼 의사나 판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밤 새워 공부한 적도 없고 정말 코피 나게 열심히 책과 씨름한 적은 더욱이 없다. 부모님 역시 공부로 나에게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고 남들처럼 과외를 못시켜 미안해 하실 뿐이었다. 아무튼 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1등은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5등 주위에서 맴돌았던 것 같다.
80년 연세대학교 지질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80년 서울의 봄은 우리를 캠퍼스에 그냥 머물러 있게 하질 않았다. 데모와 휴교가 반복되고 캠퍼스는 늘 매캐한 최류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연세교육방송국의 동아리에 들어가 나 나름대로의 시대를 향해 조그만 반항을 해보았다. 그러다보니 강의실보다는 방송실로 직행하는 날이 더 많았다. 처음에는 비록 아마추어지만 방송 PD일이 내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해 나도 졸업 후 동아리 선배들처럼 방송국에 취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때까지도 나는 내가 인생을 걸고 해보고자 하는 일을 찾지 못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은 우연히 찾아왔다. 아니 필연적이었는지 모른다. 3학년 때 강원도 태백지역의 야외지질조사를 가게 되었다. 그 당시 태백과 영월은 탄광과 광산으로 대변되는 오지였다. 야외조사를 인솔하신 이하영 교수님은 언행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학자적인 기풍으로 내심 존경하고 있었던 교수님이셨다. 이분의 연구 분야는 ‘코노돈트’라는 크기가 2mm 미만의 아주 조그만 화석인데 진화가 매우 빨라 고생대 지층의 나이를 결정하는데 전세계적으로 이용되는 표준화석이다. 크기가 작아 야외에서는 코노돈트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강원도의 높은 백운산을 오르내리며 촘촘히 석회암을 채취했다. 채취한 석회암을 실험실로 가져와 빙초산에 녹이면 잔재물들이 남고 이를 현미경을 통해 화석을 골라낸다. 이 조그만 화석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고 예쁘다.
나는 암석 속에 그 시대에 살던 생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 화석을 통해 지층의 나이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만지고 있는 화석이 현재에는 살지 않는 과거 4억7천만년 전 얕은 바다 속에 살던 생물의 잔해라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인간의 역사에서 천년은 매우 긴 시간이지만 인간의 시간을 훨씬 뛰어넘는 46억년이라는 방대한 지구의 역사 속에서 지구상에서 살다간 생물들은 나에게 흥미로움을 뛰어넘어 내가 밝혀내야 하는 하나의 목표로 갑자기 굳어졌다. 나는 방송국 취직의 유혹을 뿌리치고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물론 이하영 교수님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나의 학문, 아니 나의 공부는 진정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학원 시절은 즐거웠다. 그 이유는 공부의 대상을 찾았고 그 과정이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화석을 찾아 산을 타는 것도 자연을 좋아했던 나의 성격과 맞았고 학부시절 소홀히 했던 지질학을 좀 더 깊게 알게 되면서 지구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가에 대한 통찰력도 생겼다. 이하영 교수님의 성심어린 지도로 나는 코노돈트 화석을 깊게 알게 되었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군대를 갖다온 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은 박사과정에서 코노돈트 연구를 계속하길 권하였으나 그 당시 나는 새로운 화석에 관심이 가있었다. 그 화석은 다음 아닌 공룡화석이었다.
공룡은 1억6천만년 동안 지구를 지배한 가장 성공한 육상동물이다. 나는 왜 공룡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구에서 번성했는지, 왜 그렇게 갑자기 절멸했는지 궁금했다. 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도 공룡발자국이 경남 고성을 시작으로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발자국이 있다면 분명 공룡뼈 화석도 필히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뼈화석을 공부하려면 척추고생물학으로 방향을 크게 틀어야 한다. 조그만 미화석을 연구하다가 생물학에 더 가까운 척추동물화석을 연구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우리나라 어느 대학에서도 척추동물화석을 가르치는 곳이 없었고 또한 척추고생물학을 전공한 분도 없었다. 선배들의 만류에도 나는 교수님께 내 결심을 말씀드리고 곧 유학 준비에 들어갔다. 유학 장소는 공룡연구가 가장 앞서있는 미국 중부지역으로 정하였다. 집안 형편이 자비로 유학을 갈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토플과 지아르이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다. 내가 바라는 목표를 위해 열심히 시험공부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인 듯하다. 다행히 좋은 점수를 받아 나는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남부감리대학으로부터 학비면제와 생활비 지원이라는 좋은 조건의 장학금을 받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지도교수님은 세계척추고생물학회 회장인 루이스 제이콥스박사님이였는데 그는 나에게 혹독한 가르침을 주었다. 척추동물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했던 나는 수준 높은 비교해부학 강의를 들어야만 했고 여름방학에는 심지어 의과대학에서 의대생들과 인간해부를 직접 해야만 했다. 기초없는 학문은 거짓말을 하게할 뿐이라는 제이콥스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중국 학생은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풍부한 화석을 가지고 박사논문을 썼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논문 지역을 텍사스 중부 백악기 지층으로 정하고 뼈화석을 찾는 야외조사부터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탐사를 하면서 척추동물화석을 찾는 법은 배워나갔으며 내가 찾은 화석을 직접 실험실 처리를 하면서 뼈화석에 더욱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좋은 논문들로 이어졌다. 5년만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1년을 더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새로운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동안 미국에서 자리를 잡으라는 유혹도 있었지만 1996년 나는 과감히 짐을 꾸려 귀국길에 올랐다. 물론 한국에서 오라는 곳은 없었다. 유학 갈 때도 그랬지만 좋은 직장을 목표에 두고 공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국하여서도 쉽게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귀국할 즈음 한국은 공룡에 대한 ‘붐’이 서서히 불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쥐라기 공원’영화의 흥행성공이 계기가 아닌가 싶다. 많은 할 일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 나는 해남 우항리 공룡발자국 발굴을 시작으로 최근 경남 하동군의 하동수쿠스 악어까지 전국의 모든 중생대층을 밟고 또 밟았다. 우리나라의 중생대층은 공룡화석을 찾을 수 있는 곳이 해안절벽이나 산절개면, 하상 노두 등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뼈를 찾기란 백사장에서 바늘찾기에 비유된다. 또한 뼈의 실마리를 찾았다 하더라도 암석이 매우 단단해 중장비를 동원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한다. 외국처럼 발굴하기 쉬운 지질 조건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공룡화석이 쉽게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중생대 암석을 샅샅이 뒤져나갔다. 내 눈앞에는 공룡발자국, 공룡알, 공룡뼈, 거북, 악어, 익룡 등 다양한 척추동물화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들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나를 놀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바로 내가 공부해야할 대상이고 중생대의 한반도의 주인들 이였다. 비통하게도 1994년 미국 유학시절 이하영 교수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분은 나를 공부의 길로 이끄셨고 제이콥스 교수님는 나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척박한 우리나라의 척추고생물학 연구에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야외조사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미지의 동물들은 아무도 들추지 않은 지구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튀어나와 나를 유혹하며 계속해서 나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 이융남 선임연구원은…
국내 최초로 척추고생물학을 전공한 학자이다. 그가 2002년 경남 하동에서 발견한 중생대 악어화석은 '하동수쿠스 아세르덴티스'라는 이름으로 2005년 세계 학계에 공식 보고됐다. 그는 이미 미국에서 공부중이던 1990~96년 사이에 새로운 갑옷공룡, 익룡, 악어 등 고생물 4종과 공룡발자국, 새발자국을 발굴해 '리'라는 성을 학명에 달아놓았다.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지질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95년 미국 남부감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스미소니안 자연사박물관 객원연구원을 지내고 96년 귀국했다. 연세대 서울대 등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전남 해남 우항리의 공룡발자국과 경기 화성시의 국내 최대 공룡알 화석지를 발굴ㆍ연구했다. 2001년부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근무하면서 국내외 공룡화석 탐사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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