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 잃게 할 수 있다" 협박
2004년 총선 때 ‘선거혁명을 이루자’는 거센 흐름 속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던 선거 브로커들이 5ㆍ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들이 다시 꿈틀대는 시작한 저변에는 기간당원제가 있다. 지난해 당내 경선에서 기간당원 확보를 미끼로 움직인 경선 브로커들이 이제 지방선거를 무대로 한 선거 브로커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 장면 1
강원지역의 한 광역의원 출마 예정자인 A씨에게는 OO상인연합회 OO조합 등 각종 이익단체 관계자들이 자주 찾아온다. 표를 모아줄 테니 자기 단체에 이익되는 내용을 공약에 포함시키라는 것이다. A씨는 “상대 후보에게도 찾아갈 사람들이라 거절했다”고 말했다.
# 장면 2
경북 지역에서 기초단체장 출마를 검토중인 B씨에게 최근 여론조사 회사 직원이 출마예상자 지지율 조사결과를 갖고 찾아왔다. 조사를 의뢰한 적은 없지만 500만원을 주고 자료를 받았다. 그는 다음 번 조사결과가 나오면 다시 오겠다고 했다. B씨는 “판세도 궁금했지만 거절하면 불이익이 돌아올 까봐 돈을 주었다”고 털어놓았다.
선거 브로커들은 정치 신인이나 지지율이 낮은 후보를 먹이감으로 삼는다. 지난 총선에서 낙선한 김 모(53)씨는 “막판에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거 브로커들과 거래를 하게 된다”고 회고했다.
브로커들은 예전에는 향우회 동호회 동창회 등의 명단을 갖고 찾아왔다. 최근에는 이익집단을 앞세우거나 여론조사 회사나 정치컨설팅 회사를 차려 접근하는 신종 브로커들이 많다.
서울 시의원 출마예정자 C씨에게 한 여론조사회사 간부가 찾아와 “여론조사를 했더니 당신이 되겠더라”라고 말했다. 의뢰하면 컨설팅도 곁들여 주겠다며 50만~200만원으로 구분되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이 회사는 출마예정자 10여명을 모두 찾아가 동일한 수법으로 계약을 시도했다.
충남 지역에서 시장 출마예상자인 D씨에게도 여론조사 직원이 찾아왔다. 출마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지지율을 조사 중인데 계약을 해야 결과를 알려준다고 했다. 계약을 하지 않으면 조사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홍보가 어려울 것이란 경고도 곁들였다. “표를 얻어줄 수는 없어도 수천 표를 잃게 할 수는 있다”는 으름장에 계약하고 말았다.
정치컨설팅이나 선거기획사 간부명함을 내미는 브로커들은 좀 더 교묘하다. 겉으로는 선거유세와 전화 홍보, 홍보물 작성 등의 업무를 지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유권자의 신상정보를 건당 금액을 정해 거래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유권자 이메일은 건당 100~200원, 휴대폰 번호는 건당 500~1,000원, 그외 개인 미니홈페이지인 ‘싸이’ 주소와 간단한 개인 이력 등이 더해지면 금액이 더 올라간다. 한 초선 의원은 “성별 연령별 지역별로 구분된 이메일 주소를 개당 100원씩, 지역 유권자 1만명에 대해 100만원에 넘겨받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지방 중ㆍ소 도시일수록 선거철만 되면 신생 여론조사회사나 정치컨설팅 회사가 갑자기 늘어난다. 영세 광고회사나 출판ㆍ기획ㆍ이벤트 회사들이 이 기간동안 선거용 간판을 바꿔다는 경우가 허다하다.
관내 이익단체 간부들이 브로커 역할에 나서는 사례도 있다. 친목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강하기 때문에 후보들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원봉사를 자처하다가 중반에 이르러 활동비 명목의 금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으며, 금품 외에 소속 단체의 민원사항을 요구하기도 한다.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장은 “브로커가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해를 끼칠 수는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며 “어쩔 수 없이 브로커와 관계를 맺더라도 깊이 의존하지는 말고 유권자와의 접촉빈도를 높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
전준호기자 jhjun@hk.co.kr
박경우기자 gwpark@hk.co.kr
■ 경선 브로커도 활개
5ㆍ31 지방선거에 경기도 기초단체장 선거출마를 준비중인 A씨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방문을 받았다. 사무실로 불쑥 찾아온 이 사람은 “내가 500여명의 기간당원을 확보하고 있다. 1인당 3만원씩 1,500만원만 주면 당내 경선에서 이길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A씨는 “내가 당신 얼굴 본적도 없는데, 그런 표는 필요 없다”고 물리쳤다. A씨는 “두 번째 출마라 망정이지 처음이었다면 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에서 구청장 선거를 준비하던 B씨는 지난해 7월 비슷한 경험을 했다. B씨를 찾아온 한 남자는 “당신을 지지할 당원을 여러 명 모아줄 수 있다. 당비 낼 돈과 약간의 수고비만 주면 된다”고 말했다. 당내 경선 승리가 절박했던 B씨는 유혹에 넘어갔다. 이 남자는 356명의 당원을 모아왔고 B씨는 이들의 당비 10개월치 712만원을 포함, 1,000만원을 건넸다. 결국 B씨와 이 남자는 선관위에 적발돼 검찰에 고발됐다.
일반 유권자의 표를 모아주겠다는 선거 브로커와 함께 최근에는 당내 경선을 돕겠다는 브로커도 활개를 치고 있다. 여야가 기간당원(당비를 내는 진성당원) 제도를 도입하면서 생긴 신종 브로커인 셈이다. 후보자로서는 경선 통과가 우선인 만큼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특정 당이 강세를 보여 ‘공천=당선’이 되는 지역에서 더 기승을 부린다.
각 당이 통상 선거일 6~8개월 이전부터 당비를 낸 당원들에게 경선 투표권을 주기 때문에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들 경선 브로커의 활동이 본격화했다.
지난해 선관위가 적발한 ‘유령당원’ 당비대납 건수는 36건에 달한다. 12건은 검찰 고발, 12건은 수사의뢰를 했다. 대부분 진성당원 자격 한도 시한인 지난해 7~8월에 이뤄졌다. 당원을 모아준 브로커에게 해당 당원의 10개월여간 당비와 함께 활동비를 준 경우다.
속칭 ‘쇼부치기’ 도 있다고 한다. 브로커가 직접 당내 경선에 출마하겠다며 분위기를 띄워 활동하다 경쟁 후보들 중 열세인 후보에게 접근, “내가 출마를 포기하고 조직을 동원해 당신을 밀 테니 돈을 내라”는 식이다. 그러나 조직은 없다. 대개 돈만 받고 사라진다. 인천에서 시의원선거 출마 예정인 한 후보는 “이들이 더 고단수 브로커”라며 “한 표가 아쉬운 후보 입장에서 속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컨설팅 업체 인뱅크코리아 이재술 사장은 “상담 차 후보자들을 만나면 브로커에 관한 얘기를 부쩍 많이 한다”며 “거의 100% 사기이기 때문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 근절책 없나
선거브로커 근절책은 없을까. 전문가들도 딱 부러지는 답은 내놓지 못한다. 왜곡된 정치문화, 선거풍토에서 비롯된 문제인 탓이다. 박명호 동국대 정외과 교수는 “후보자와 브로커간 상호 필요가 악순환을 낳는 것”이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에 목을 매는 풍토가 있는 한 브로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치컨설팅 업체 ‘인뱅크 코리아’ 이재술 사장은 “조직선거와 돈 선거라는 뿌리 때문에 브로커가 기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선거풍토 개선이 전제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임혁백 고려대 정외과 교수는 “표를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국민의식부터 변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도 “유권자들이 자기 표의 가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표를 거래 대상으로 삼는 의식이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컨설팅 업체인 ‘민기획’ 박성민 사장은 “아직 과도기인 만큼 선거 투명화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단기적으론 엄격한 법 집행이 필수적이다. 임 교수는 “일벌백계의 엄중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도 폴리티컬 머신(political machine)이라는 선거브로커가 있었지만, 엄격한 선거자금 관리와 엄벌주의로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당내 경선에서 기간당원 참여비중을 축소하는 등 경선방식 개선 필요성도 제기됐다.
정녹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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