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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기자의 씨네다이어리/ 날개 꺾인 '청연'

입력
2006.01.1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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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어느 날 서울 도심의 한 극장에서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났다. 어느 홍콩 영화를 보고 분개한 일부 관객이 환불 소동을 벌인 것.

관객들은 이 영화에 량차오웨이(梁朝偉) 장궈롱(張國榮) 류더화(劉德華) 장만위(張蔓玉) 장쉐우(張學友) 류자링(劉嘉玲) 등 거명하기에도 숨이 가쁜 당대의 톱 스타들이 총출동해 잔뜩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사나이들의 핏빛 우정과 사랑이 비장미 가득한 음악과 함께 곡예운전을 하듯 펼쳐지리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관객들이 원했던 화려한 총격전은커녕 스크린은 한없이 느린 박자로 흘러갔으며 격정적인 포옹의 순간도 없었다. 핏발 선듯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남자 배우들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만 보고 입장한 관객은 충분히 배신감을 느낄 만 했다.

국내 관객으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폄하를 받았던 이 영화는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아비정전’이었다. 관객이 시대를 앞서간 걸작의 숨은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이날 소동의 주범은 지독한 선입견이었다. 홍콩 느와르라는 브랜드가 한창 주가를 올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류더화 량차오웨이가 나오면 으레 피가 흥건히 스크린을 적실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제작비 95억원을 들여 불과 60만 명 밖에 불러모으지 못한 ‘청연’도 선입견의 피해자다. 모 인터넷 신문이 ‘제국주의의 치어리더’라는 친일 낙인을 찍으며 ‘청연’의 불시착은 일찌감치 예고되었다.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고 득달 같이 달려 들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고, ‘청연’의 항로는 이륙도 하기 전 먹구름이 짙게 끼었다. 급기야 일본 자금 유입이라는 헛소문까지 떠돌면서 ‘청연’의 비상을 가로막았다.

검증을 거치지 않은 친일논란은 마녀사냥과도 같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논란은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면서 순식간에 어떤 대상에 대한 강력한 선입견을 만들어낸다. ‘청연’은 그렇게 잘못된 선입견에 날개가 꺾였다. 2년간 수 차례 무릎이 깨지며 어렵게 만들어진 ‘청연’이 보기 드문 영화적 성취를 이뤄낸 수작이라 점에서 못내 안타깝다.

왕자웨이는 94년 ‘중경삼림’으로 국내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으며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청연’도 친일논란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이른 시일 내에 온당한 평가를 받기를 기대한다.

라제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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