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별세한 체육계의 원로 민관식 박사는 ‘영원한 청년’이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 있는 고인의 사무실 문에 적힌 ‘평생 공부 평생 현역’이라는 글귀처럼, 그는 별세 전날에도 지인들과 테니스를 치고 매일 5㎞ 도보와 1㎞의 수영으로 땀을 흘리는 등 건강을 과시했다.
특히 최근에는 사학법 개정 반대 시위장을 비롯, 각종 행사장에도 모습을 나타내는 등 미수(米壽)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해왔다. 고인은 생전에 “늙은이를 부려 먹으려는 ‘놈’들이 아직도 너무 많아 죽겠어”라고 농을 던지면서 행복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고인은 정ㆍ관계, 체육계, 학계, 언론계 등에서 폭넓은 활동을 했다. 5차례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부의장에 문교부장관, 대한약사회장, 대한테니스협회장, 대한축구협회장, 대한체육회장, 성균관대 이사장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직함을 섭렵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부터 67년까지는 고려시보사 사장으로 언론계에서 일하기도 했다.
54년 서울 동대문구에서 3대 민의원으로 당선된 뒤 내리 4, 5, 6대 국회의원에 뽑혔다. 71년 문교부장관에 발탁돼 잠시 정치를 떠났던 그는 79년 10대 총선에서 정치 1번지라고 불리는 서울 종로ㆍ중구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또 당선돼 국회에 진출, 국회부의장과 국회의장 직무대리를 지냈다.
문교부 장관 시절에는 고교 입학 무시험 정책을 수립했고, 실용한자 1,800자를 제정해 국한문 혼용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74년 육영수 여사 시해 사건이 났을 때 일본과의 단교를 결심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단교는 절대 안 된다”고 직언을 했다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정치권과의 끈을 놓지 않아 별세 전까지 한나라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정ㆍ관계에서의 큰 족적에도 불구하고 고인에게는 ‘한국 체육계의 큰 별’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 고인은 생전에도 자신이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장으로 태릉선수촌을 건립,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으로 키워냈다.
‘선수촌을 지으려면 태릉으로 가 보라’는 꿈을 꾸고 나서 태릉 부지를 물색했다는 일화는 체육계 인사들에게 지금도 회자되는 일화다. 테니스 마니아였던 고인은 60년대 자신의 아호를 따 ‘소강(小崗) 배 전국 중고테니스대회’를 창설, 50여년간 사재를 털어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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