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흙으로 돌아갈 육체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더구나 의대 다니는 우리 손자가 해부용 시신이 부족해 공부에 어려움이 많다는데….”
고 박영길ㆍ조영주씨 부부는 생전에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 뜻에 따라 12일 94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숨진 아내 조씨의 시신은 13일 오전 서울 송파구 가락동 국립경찰병원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손자가 졸업한 중앙대 의대로 보내졌다. 앞서 2000년 87세로 숨진 남편 박씨의 시신 역시 중앙대 의대에 전해졌다.
손자 박지명(35ㆍ의사)씨는 “할머니는 평소 ‘자신의 육신을 기증하는 것이 가장 쉬운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씀하셨다”며 “할머니의 마음이 제 후배들을 좋은 의사로 길러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조씨의 시신기증은 사랑의장기 기증운동본부(이사장 한정남)가 1991년 시신기증 운동을 벌인 지 15년 만에 이 단체를 통한 1,000번째 기증으로 기록돼 의미를 더했다.
집안 어른이 보인 아름다운 마음은 가족 전체로 이어졌다. 조씨의 아들인 박병식(66ㆍ목사)씨는 “부모님이 먼저 기증 의사를 밝히는 모습에 나머지 가족들도 그 뜻을 따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부모님과 부인 김정희(56)씨, 아들 박성훈(32)씨와 함께 1995년 12월 장기기증운동본부를 찾아 뇌사 시 장기기증 및 사망 후 각막기증, 시신기증 서약을 했다. 첫째 아들 지명씨와 딸 미경(36)씨도 2000년 장기 및 시신기증 서약을 해 일가족 7명이 모두 기증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둘째 아들 성훈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시신을 만지게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지만,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함께 약속을 지키시고 떠나시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뜻에 따라 나머지 가족들도 기증 약속을 지킬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기증 운동에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의과대 실습용으로 기증되는 시신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장기기증운동본부 최승주 사무국장은 “조 할머니처럼 가족 단위의 장기기증 약속이 늘어나고 있지만, 1년에 400~500구 정도인 필요량에 비해 실제 기증되는 시신은 절반 수준”이라고 밝혔다. 최 국장은 “현행법 상 기증자가 시신기증을 약속하더라도 유가족이 반대하면 시신을 기증받을 수 없다”며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유교적 관습을 그 이유로 꼽았다.
각 대학별로 기증되는 시신 숫자의 편차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연세대와 가톨릭대 등 서울의 몇몇 대학은 실습용 시신을 자체 수급할 수 있으나 지방대나 비(非)기독교계 대학들은 시신이 없어 제대로 된 해부학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최 국장은 “졸업할 때까지 시신 한 번 못 보고 졸업하는 의대생들도 있다”며 “치대ㆍ한의대 등에서도 실습용 시신을 요청해 오는 만큼 시신기증에 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