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과세상/ 배수아 소설집 홀 "쓸쓸함도 사치일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과세상/ 배수아 소설집 홀 "쓸쓸함도 사치일뿐"

입력
2006.01.14 09:56
0 0

배수아씨가 등단한 게 1993년이다. 이제껏 19권의 책을 냈고, 그 가운데 소설이 15권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써낸 작품의 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이 여전히 도발적이고 모호하고 문제적이라는 평가 속에 머물러있다는 점이다.

반복된 도발은 도발성이 무뎌지는 게 통례지만, 그의 문학이 그 관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힘과 도발의 맥락이 여전히 위력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해석 안에서 그의 문학은 찬사와 폄하의 상극적 평가의 탄력을 지탱해 왔다. ‘당나귀들’ ‘독학자’ 등 최근 작품들을 두고도 “문학의 정치성을 전면화한 드문 작품”(조현일)이라는 데서부터 “자의식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소설이 아닌…”(심진경)이라는 데까지 촘촘한 평가의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

2편의 중편과 5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번 작품집 ‘훌’ 역시, 그의 기존 작품에 대한 평가의 간극을 좁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상반된 극단의 모호한 경계, 그 모순적인 자리에 그의 문학이 서 있다는 점만으로도 그는 가치 있는 작가라 할 만하다.)

이번 작품들은 그 글쓰기 방식에 있어 조금씩 이질적이다. 첫 작품 ‘회색 時’나 ‘시취(屍臭)’가 사유와 관념의 에세이적 글에 두어 건의 잔 서사를 얹은 경우라면, 표제작인 ‘훌’(중편) 등은 마치 부조리극을 연상케 하는 분절적이고 해체적인 서사로 이어진다. 비교적 뚜렷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편 ‘집돼지 사냥’(중편)과 ‘우이동’도 있다.

이들 작품의 스타일 변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녹여 들인 메시지는, 늘 그랬듯이, 단호하다. 가령, ‘회색 時’의 ‘나’의 독백들 “지나간 시간이 그 내용과 관계없이 결국은 수치이자 죄의식일 수밖에 없다(…) 그 수치는 무지와 경솔함에 대한 도덕적 수치이며 필연적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깊은 환멸과 회의로 종결된다.(…) 죄의식,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둔할 뿐이다.”(12~13쪽)고 할 때의 시간과 역사, 사회에 대한 염세적 허무주의.

“나에게 아름다움이란 친밀과 교제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관조의 대상이며 또한 오직 그렇게 남아 있을 때만이 불변의 가치를 발휘한다”(23쪽)는, 관계와 소통의 한계에 대한 확고한 인식 혹은 자발적 자폐의지. 심지어 ‘나’는 ‘우리’가 손 잡고 인사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이별하는 ‘타인’의 실체마저 의심하고 부인한다.

“그들이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타인이 정녕 애증의 대상이기나 한 것일까.”(34쪽) 그 의심과 부인은 허무와 비관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집돼지…’에는 남성에 대한 갈망과 증오라는 양가감정에 시달리는 여자 ‘요란’이 나온다. 그가 남자 ‘희태’를 선택하는 까닭은 “(희태는) 조금 떨어져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마치 서서히 사라지기로 작정한 것처럼 서 있는”(185쪽)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과 주변 인물들은 소설 전체에서 드물게 긍정적인 ‘관계’로 부각된다.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삶은 줄거리 없는 소설과도 같이 느껴졌다.(…) 뭔가 결여된(…) 그것은 운명적 결핍이라기보다는 자의적 생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213쪽)

‘쓸쓸하다’는 말은 “세상에 대해서 주체의 의지와 애정을 가지고 있을 때 허용”될 뿐, 그게 아니라면 “잘못 흘린 눈물처럼 과잉되거나 부조리하거나 철면피한 것”(253쪽)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어설픈 동정이나 충고 따위는 무례이고 폭력이다. 그 무례와 폭력이 행해지는 자리에 ‘군중’이 있음은, 작가가 일관되게 지적해온 바다.

경계하시라. 그 ‘군중’은 우리 곁에도, ‘나’의 마음 속에도 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