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패션 창의성의 전권을 행사하던 시대는 지난 것일까. 6일 서울 청담동 바 트라이베카에서 열린 캐주얼 브랜드 쌈지의 패션쇼는 낸시 랭이라는 개성적인 팝 아티스트를 예술 감독(아트 디렉터)으로 기용, 마니아 브랜드에로의 잠재력을 한껏 과시했다.
내셔널브랜드가 샤넬이나 구치 같은 해외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에서나 볼 수 있는 아트 디렉터 체제를 도입한 것은 매우 이례적. 상품 자체보다 이미지와 감성을 소비하는 시대 정신은 패션에도 ‘아티스트’의 예민한 손끝을 요구하는 모양이다.
행사는 쌈지(대표 천호균)가 이 달 중순 출시하는 ‘낸시 랭 라인’을 홍보하기 위한 자리였다. 패포먼스(패션+퍼포먼스)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이 행사는 기존의 패션쇼 형식을 파괴해 흥미진진한 퍼포먼스로 펼쳐졌다.
출연진은 2000년대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혹은 아리송한’ 인물로 꼽히는 팝 아티스트 낸시 랭, 700명의 후보자 중 오디션을 거쳐 그녀의 추종자들로 설정된 47명의 ‘리틀 낸시’, 그리고 낸시 랭이 아트디렉팅을 맡은 150여벌의 옷이다.
극장식으로 설치된 무대는 크게 3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됐다. ‘새디스틱 낸시 랭’이라는 이름의 첫번째 무대. 스쿨걸 룩의 소녀들이 불량 소녀와 모범 소녀로 나뉘어 외국어 공부를 하는 교실, 도미나트릭스(DominatrixㆍSM 플레이에서 여주인 역)로 분한 여교사 낸시 랭이 가죽 숏 팬츠에 란제리 탑을 입고 채찍을 휘두르며 모범생들의 반란을 부추긴다.
‘천사와 악마, 모두 캔디를 좋아해’라는 제목의 다음 무대는 할아버지뻘 되는 외국인 남성과 춤을 추는 낸시 랭 주위로 롤리타 룩의 소녀들이 막대 사탕을 빨며 춤춘다.
‘셀러브레이션 마이셀프’라는 주제의 마지막 무대는 포토월 주위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져 셀카를 찍느라 여념 없는 소녀들과 그들의 우상 낸시 랭이 함께 액션 페인팅 작품을 완성한다. 작품은 경매를 통해 엄청난 고가에 팔리고 돈 다발은 의기 양양하게 허공에 뿌려진다.
공개 오디션을 통해 700명의 일반인들 중에 선발된 리틀 낸시들은 한결같이 초미니 스커트에 배꼽이 드러나는 니트나 셔츠, 짧은 재킷에 반바지 차림으로 무대와 객석을 흔들었다.
일반적인 모델과는 달리 165㎝ 내외의 중키에 평범한 외모. “10~20대 일반 여성이 입는 내셔널 브랜드에 팔등신 패션 모델을 기용할 필요는 없다”는 아트디렉터 낸시 랭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쌈지는 그 동안 설치 미술가 최정화, 이불 등과 손잡고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지만 일부 상품에 작품 이미지를 사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브랜드 행사는 천호균 대표 스스로 “이렇게 질러 본 건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트디렉터 낸시 랭에게 상품 개발과 마케팅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작전은 일단 성공적으로 보인다. 10~20대 신세대들이 열광하는 코스튬 플레이(복장 놀이)나 미성숙한 여성성의 도발, 셀카(셀프 카메라)로 대변되는 자기 도취 등 신세대 문화의 다양한 면모들을 패션의 울타리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상품화한 것은 높이 살만하다.
패션계에 아트디렉터 시대의 도래를 점치는 의견도 나왔다. 패션 평론가 유재부씨는 “옷 자체의 완성도 보다는 타킷 소비자층의 문화와 감성을 제대로 파악한 점이 돋보인다”면서 “굳이 직접 디자인 하지 않더라도 브랜드의 전체 이미지와 감성의 밸런스를 맞춰 줄 아트 디렉팅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낸시 랭은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트렌드 감각으로 승부한다는 생각은 아예 버렸다”면서도 “중요한 점은 옷이 입는 사람에게 꿈과 희망, 마음을 건드리는 위안이면서 즐거움이 돼야 한다는 것이고 그건 예술의 역할과도 일맥 상통한다”고 말했다.
양말이나 신발 바닥에 행운의 네잎 클로버 문양을 달고(행운을 밟고 다니라는 뜻) 핸드백 안쪽에 ‘Made in Heaven’이라고 씌어진 택을 붙여 소비자와의 교감을 꿈꾸는 낸시 랭 라인은 쌈지 매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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