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게이, 남아프리카의 흑인, 유럽의 황인종,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남미의 마야 원주민, 독일의 유태인, 폴란드의 집시, 퀘벡의 인디언, 보스니아의 평화주의자, 밤 10시 뉴욕 지하철의 여인, 땅 없는 소작인, 슬럼가의 갱, 직업 없는 노동자, 행복하지 않은 학생, 그리고 산 속의 사파티스타. “우리가 바로 이들, 당신들이다.”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자기라는 주장이다. 누구나 나와 같다면 나는 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 즉 ‘비자아(非自我)’, 또는 ‘무자아(無自我)’이지만 그것으로 더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다.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의 혁명 게릴라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그리고 이를 이끄는 마르코스 부사령관이다.
눈 코 입만 뚫린 검은 털모자 차림. 얼굴 없는 ‘얼굴’로 유명하다. 그 입 사이로 담배파이프를 문 마르코스는 신비로운 흥미를 일으키는 상징이다. 이 숨가쁜 정보사회에서도 마르코스의 정체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이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합법적 행진을 벌여 떠들썩했던 것은 2001년 3월. 마르코스는 반군 게릴라로 멕시코 정부의 체포령이 내려진 상태였으나 야당 출신 비센테 폭스 대통령의 화합정책 덕에 합법적 신분을 얻었다.
치아파스 거점도시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를 출발한 이들의 트럭 행진은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이어졌고, 도시 한 복판 광장에서 정부와 신사협정을 맺는 장면은 세계적 화제가 됐다.
대학을 졸업한 도시 출신의 마르크시스트 인텔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며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찾아 산 속으로 들어갔으나 거꾸로 토착 마야문화에 사로잡히게 됐다는 정도가 알려진 마르코스의 이력이다.
■정연하고 힘찬 논리, 그러나 따뜻한 웅변이 마르코스의 지도력이다. 무엇보다도 몸을 던져 생각을 실천한 그는 체 게바라 이래 상징을 상실했던 전 세계의 좌파들에게 살아 있는 ‘체’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어떤 분석가는 반세계화 운동의 국제적 배후로 그를 지목한다. 산 속에서 인터넷망으로 활동을 하는데, 26개국 4만5,000개의 웹사이트가 그와 관련돼 있다고 한다. 마르코스 일행이 이번에는 오토바이 행진으로 멕시코 전국을 순회하고 있다.
무장봉기 12주년인 올해, 대선을 앞두고 사회 각계와의 연계를 모색하는 ‘제3의 캠페인’을 위해서다. 6개월 일정으로 1일 출발했다는데, 후속 보도가 안 나와 궁금하다. 마스크 속의 얼굴에 주름이 꽤나 생겼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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