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가 한국인의 대표적 특성이라곤 하지만, 이것만 강조했다간 한국인의 또 다른 특성인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리기’를 놓치게 된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게 사립학교법 파동과 농민 시위 사건이다.
한국사회의 갈등을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키는 최대 요인 중의 하나는 ‘맥시멀리즘’이다. 맥시멀리즘의 좌우명은 “큰 것이 아름답다”는 것인데, 이는 한국사회에 팽배해 있는 ‘거대담론증’과도 통한다.
안재홍이 조선의 운동은 걸핏하면 최대형의 의도와 최전선적 논리에 집착해 과정적 기획정책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한 건 1931년이었는데,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습속은 여전하다.
●사학법 파동 뒤늦게 난리법석
사학법 개정을 ‘종교 탄압’이나 이념 문제로 몰고 가는 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믿어서라기보다는 일단 크게 치고 나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오랜 습속에서 비롯된다.
정부 여당도 마찬가지다. 사학 비리 문제를 실용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4대 개혁’ 운운하면서 정권의 명운을 거는 과시적ㆍ전투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필요 이상의 반발을 초래한 점이 있다.
사학법 개정 이전에 양쪽 모두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리기’를 택했다는 것도 놀라울 정도로 같다. 그간 수많은 사학 비리들이 터져 나왔다. 다수 여론이 사학법 개정에 찬성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경악할 만한 건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학 단체들이 무대책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가장 펄쩍 뛰면서 그 어떤 대안을 강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해야 할 쪽은 누구인가? 깨끗한 건 물론이고 사재를 털어 학교를 운영해온 양심적인 사학 재단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침묵을 택했고, 사실상 자업자득으로 돌아온 사학법 개정에 대해 뒤늦게 분노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 ‘빨리빨리’ 정신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사학 비리로 인해 수많은 사학 분규가 일어났을 때 정부는 공정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했던가? 부디 언론에 당부한다. 별 의미도 없는 대선 후보 지지도 조사 그만 하고, 그간 정부의 사학 정책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전문가 대상 여론조사를 실시해보기 바란다. 어쩌면 한국인은 ‘빨리빨리’를 저주한다는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농민 여의도 집회 시위 사건과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농민 2명이 사망한 비극을 보자. 경찰청장이 물러난 걸로 이 사건은 끝났는가? 아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은 93년 말이었다.
그간 정부는 무엇을 했으며, 그간 해온 일이 왜 실패로 돌아갔는가? 농민들이 생존의 벼랑 끝에 몰려 목숨 걸고 폭력시위에 나서게 돼 있다는 걸 몰랐나? 너무 느려 터져서 모른 건가, 아니면 스스로 곪아 터지기를 기다린 건가?
그건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폭력시위엔 폭력진압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경찰청장 혼자 책임질 일이 아니다.
그간 참여정부는 역사에 우뚝 서고자 하는 과욕으로 거대담론에만 집착한 나머지 현안 해결에 소홀했던 건 아닌지, 차분하게 평소 실력 쌓아가기보다는 바람으로 단판 승부를 보려는 유혹에 굴복했던 건 아닌지, 성찰해야 마땅하다.
●갈등 해소야말로 빨리빨리를
언론은 어떤가. 제발 쌀 시장 개방을 ‘국익론’으로 포장했던 자신의 과거도 상기해보면서 그 국익의 분배가 어떻게 하면 농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대안 제시에도 ‘빨리빨리’를 외쳐주면 좋겠다. 농민과 농민의 아들이 쇠 파이프와 방패 모서리를 주고받으며 싸우는 비극을 막는 것 이상 시급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립학교법 파동과 농민 시위 사건뿐만이 아니다. 폭발을 기다리는 갈등은 도처에 널려 있다. 우리는 갈등 해소에 ‘빨리빨리’를 외치는 법은 없다. 한국사회는 ‘빨리빨리’가 부족하고 ‘곪아 터지기’를 기다리는 게 문제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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