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중국인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ㆍ사진)가 8일로 서거 30주기를 맞았다.
사망한 지 30년이 흘렀지만 이날 중국 전역에서는 탁월한 정책가, 실용 친화력의 대명사인 그의 일생을 애도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100만 명 이상이 그의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해 모였던 30년 전과 비교해 결코 시들지 않은 추모 열기였다.
고향 장수(江蘇)성 후아이안(淮安)은 물론 베이징(北京) 난징(南京) 톈진(天津) 등 전국 각지에서 학술대회, 토론회, 시낭송회, 추모 집회가 줄을 이었다.
언론과 참석자들은 온갖 미사여구를 써가며 그의 인격과 풍모, 애국심, 역사적 공적을 칭송했다.
신화통신은 “마오(毛)가 없었으면 중국 공산혁명의 불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저우(周)가 없었다면 혁명은 재가 됐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언론들은 그가 숨졌을 때 부부의 저축액이 5,100위안(元ㆍ한화 65만원)이 전부였다며 청빈한 무산자의 삶을 기렸다.
중산복과 검은 코트, 중절모가 트레이드 마크인 저우 총리는 총리(49~76년), 외교부장(49~58년)을 역임하며 냉전 시대 중ㆍ미, 중ㆍ일 수교, 조ㆍ중 국경선 획정을 이끄는 등 중국 외교사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외교에는 작은 일이 없다”는 명언을 남겼으며 외국인과 협상 전 반드시 국수로 배를 채우고 회담에 임했던 일화로 유명하다.
최근 발굴된 자료에서 1963년 그가 고조선과 발해는 한반도의 역사며 중국 역사라는 주장은 학자들 붓끝에서 나온 오류라고 언급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는 김일성과 친분이 두터워 생전 김이 선물한 파커 만년필을 애용했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ds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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