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여행은 희망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다. 그래서일까, 새해 첫 여행은 의식에 가깝다. 말갛게 떠오르는 일출 명소나 영험한 효력이 지녔다는 사찰이 붐비는 것도 그런 연유다. 장쾌한 풍광이 펼쳐지는 바다, 탁 트인 산 정상의 후련함을 구비했다면 또 뭘 바랄까. 이런 소망을 충족시켜주는 절호의 장소가 경남 남해 금산의 보리암이다.
보리암은 영험한 사찰로 유명하다. 서해 강화의 보문사, 동해 양양의 낙산사와 함께 국내 3대 기도 도량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여기에 일출이 더해진다고 생각해 보라.
동해도 아닌 남해에서 일출을 운운하니 고개를 갸웃거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양은 동지를 전후해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겨울에는 남해에서도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수긍 가리라.
아니, 수많은 점처럼 이어지는 섬 연봉 너머로 솟는 해는 망망대해 속에 솟아나는 동해의 밋밋한 일출보다 가슴의 울림이 훨씬 크다. 그 진한 감동을 찾아, 새벽 바람을 가르며 보리암을 찾았다.
보리암으로 오르는 길은 이동면 복곡저수지 매표소(일출시간에는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에서 시작된다. 매표소를 지나 산 비탈을 따라 비포장길로 10여분을 달리니 30대 가량의 차를 세울 수 있는 주차 공간이 나온다. 차를 세우고 본격 산행에 나선다.
보리암까지는 1㎞ 남짓. 산행이라기 보다는 산보에 가깝다. 산 아래에서 가파른 산을 거슬러 올라온 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을 각오는 해야 한다. 20분만에 보리암에 도착했다. 대부분 관광객이 일출을 맞는 곳이다.
그러나 보다 나은 풍광을 원한다면 발품을 더 팔아야 한다. 보리암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20분을 더 올라 정상인 망대가 그 곳이다. 해발 681m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왼쪽으로는 멀리 한려수도의 섬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범섬, 사도, 애도, 죽암도, 미도, 큰섬 등 30여 개의 섬들이 태평양을 향해 내달린다.
바다에 산봉우리들이 떠 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오른쪽으로는 보리암 너머 활처럼 굽은 상주해수욕장이 어슴푸레하니 실루엣을 그려낸다.
망대와 함께 일출 명소로 손꼽히는 곳은 보리암 뒤에 자리한 화엄봉 주변이다. 보리암 암자와 해수관음상 사이로 펼쳐지는 섬 연봉 뒤로 수평선을 헤집고 솟아 오를 태양. 여태껏 보았던 어떤 일출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숨막히는 아름다움에의 예감에 삭풍도 잊었다.
조금씩 사위가 밝아지고 천지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렇지만 해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평선에 구름이 낀 까닭이다. 몇 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구름 속에서 살포시 고개를 내민 태양이 눈에 잡힌다. 겨울 태양은 여름에 비해 뿜어내는 열기가 적어서인지 이글거림은 약하지만, 그 부드러움이 별스런 감흥으로 다가왔다.
일출의 감동만으로 보리암의 진면목을 다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착각이다. 보리암을 품은 금산은 소문난 명승지이다. 산으로는 유일하게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는 것도 다 까닭이 있다. 정상 부근이 온통 돌산인 덕에 볼거리가 널렸다. 천가지 형상, 만가지 전설을 담고 있는 바위의 천국을 보았는가.
대표적인 바위는 쌍홍문이다. 보리암에서 상주해수욕장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돌문이 나타난다. 직접 만든 돌배를 타고 석가세존이 이 문 한복판을 뚫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해수관음상 너머 너럭바위에는 야릇한 전설이 전한다. 한 과부가 자신을 짝사랑하다 상사병에 걸린 청년을 이 곳에 데려와 회포를 풀어주었다고 해서 상사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장봉, 촉대봉, 음성굴, 향로봉, 사자암 등 이름만 들어도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바위들이 지척에 널렸다.
보리암은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창건했다고 한다. 이 곳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고 하니, 원력(願力)의 명성은 이 때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일출 명소인 화엄봉에는 원효대사가 이 봉우리에 올라가 화엄경을 읽었다는 전설이 있다.
보리암전 삼층석탑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가져 온 파사석으로 원효대사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탑의 명성은 딴 데 있다. 석탑위에 나침반을 올려놓으면 북쪽을 가리켜야 할 바늘이 남쪽으로 향하는 자기난리(磁氣亂離)현상이 일어난다. 실제로 한 관광객이 나침반을 놓으니 바늘의 방향이 60도 가까이 돌아가 버리는 현상이 버젓하게 벌어진다.
석탑속에 우주의 기가 흐르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어서 혹은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다. 과학을 가볍게 보는, 희망과 염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과학 때문에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요즘, 금산 보리암은 과학 너머의 그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남해 보리암=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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