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문제가 가시권 안에 들어온 것 같다. 새해 벽두부터 현직 국무총리, 전직 대통령, 유력 대선주자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주된 흐름은 ‘1987년 체제’로 불리는 현행 헌법의 틀을 어떤 식으로든 바꿔야 하며, 특히 공고화된 민주주의 현실에 맞게 권력구조를 개편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권력구조 개편의 논리로는 레임덕 현상이나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불일치로 인한 선거 과다, 그리고 그에 따른 국력 낭비 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있지만, 역시 핵심은 대통령 5년 단임제의 결함을 시정해 책임정치를 강화하는 데 있다.
대체로 새해 초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조한 것처럼 4년 중임제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비교적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물론 ‘우리 헌정사에서 실험이 끝난 실패한 제도’라는 비판도 없지 않고, 그동안 개헌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듯이 국가의 발전방향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비전보다는 그때그때 정치 지형에 따른 정략적 접근에 의해 권력구조 위주의 개헌이 이루어져 왔던 터에 이번 개헌도 자칫 정략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경계론도 경청할 만하다.
●권력구조는 차차기 발효케
그런 배경에서 불필요한 소모적 논란이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아예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일치 문제와 권력구조 문제에 국한해 최소한의 논의만 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아무튼 최근 총리가 강조한 바와 같이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정치 의제의 차원을 넘어 통일과 남북관계, 인권, 세계화 등을 고려한 국가 발전방향에 대한 미래지향적 숙의를 바탕으로 헌정의 새로운 틀을 짜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은, 개헌의 시급 여부나 시점에 대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주요 선진국들과는 달리 장기적 미래설계도 없이 목전의 현안 처리에 급급하며 살아온 나라이다. 불과 50여 년 사이에 경제도 일으키고 민주주의도 실현하려 했으니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에 작심하고 헌법을 바꾼다면 21세기 대내외 환경변화와 원대한 미래사회 비전을 담은 근본적인 청사진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정치의 일정에 비추어 그 같은 원대한 헌법설계가 가능할지는 의문스럽다. 역시 개헌 논의에서 우선순위를 기존 권력구조의 결함을 시정하는데 맞출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이다. 그렇더라도 과거 권력구조 위주의 개헌사에서 나타난 정략성이나 당파성을 답습하지 않기 위한 심기일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개헌을 하더라도 권력구조 부분은 차차기부터 발효되도록 함으로써 정치적 이해관계자들이 게임의 틀을 좌우하는 이해충돌의 여지를 없애야 한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개헌 논의의 비당파성과 ‘숙의’를 보장하기 위한 근본적 결단이 필요하다. 범국민적 개헌 논의를 표방하면서 국회 안에 기구를 설치하여 여야의원들과 헌법학자나 시민단체 대표 몇몇을 들러리 세우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개헌 논의의 사회적 저변을 획기적으로 확장하여 국회와 행정부 사법부 언론 노조 시민사회단체 지방자치단체 직능단체 등을 포괄한 범국민적 포럼을 만들어 현안별로 체계적으로 논의하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과 결과는 항시 공개하고 공유시켜 미래 한국의 헌법 설계를 위한 국민적 학습과 참여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범국민적 기구서 논의해야
끝으로 개헌 논의를 당리당략 차원에서 이용하려는 경향이나 유혹을 단호히 배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책임은 바로 대통령에게 있으며, 범국민적 개헌 논의를 통해 얻어진 결정사항을 철저히 확립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은 현행 헌법으로 선출될 차기 대통령의 책임이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