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라는데 저는 ‘기업 삼십 고래희(古來稀)’라고 생각합니다. 제 인생 85년보다 창업 30여 년이 제게는 더 힘들었습니다.”
매일유업 창업주 김복용(金福鏞ㆍ사진) 회장은 지난해 10월 회사 창립 34주년을 기념해 만든 사사(社史)에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결국 미수연(米壽宴ㆍ88세 잔치)을 열지 못하고 2일 밤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함남 이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북청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단신으로 월남했다. 전쟁통에 서울 을지로 방산시장에서 잡화장사를 하며 사업을 시작해 이북 출신 특유의 검소함과 신용을 밑천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김 회장은 살아 생전 “다른 사람들이 바깥에 좋은 담배를 넣고 안쪽에 질이 떨어지는 담배를 넣을 때 나는 오히려 바깥에 질이 떨어지는 담배를, 안 쪽에 좋은 담배를 넣어 팔아 신용을 얻었다”는 일화를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고인은 56년 공흥산업주식회사, 64년 신극동제분주식회사를 세워 제분업과 무역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 이를 밑천으로 71년 정부가 경제 개발 5개 년 계획의 하나로 설립한 ‘한국낙농가공주식회사’를 인수, 낙농업을 시작했다. 분유와 치즈 등 유제품 일체를 미군에 의지하던 시절, 낙농업 진출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당시 그는 농업학교 시절 꿈꿨던 ‘잘사는 농촌 건설’의 이상을 떠올리고 인수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정부와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전국의 황무지를 초지로 개간하기 시작했고, 외국에서 우량 젖소를 들여와 국내 낙농가에 공짜로 나눠주며 기반을 닦아나갔다. 창업 당시 6만2,000톤에 불과하던 국내 우유 생산량은 2002년 253만7,000톤으로 40배 이상 증가했고, 회사는 연간 매출 8,000억원에 자회사 3개를 거느린 종합식품회사로 성장했다.
고인은 낙농 산업 발전과 축산 진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78년 동탑산업훈장, 99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또 최근 3~4년간 ‘현역으로 뛰고 있는 최고령 최고경영자(CEO)’의 영예를 매번 차지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특히 지난해에는 전북 고창군 상하면에 대규모 자연치즈공장을 건설, ‘마지막 숙원 사업’을 이루었다.
사회 공헌에도 적극적이었던 고인은 75년부터 ‘매일 예비엄마 교실’을 통해 임신, 출산, 육아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자신의 호를 딴 진암장학재단을 만들어 96년부터 불우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유족은 부인 김인순(71)씨와 정완(49ㆍ매일유업 사장), 정석(47), 정민(44), 진희(41ㆍ평택물류 경영)씨 등 3남 1녀.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6일 오전 6시. 장지는 경기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 선산. (02)3010_2631
신재연 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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