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 땅에 안 계신 먼 어르신들께 올립니다. 귀하게 가꾸고 알뜰하게 보살펴 남겨주신 이 땅에서 저희가 지난해도 잘 살았습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삼 그 음덕(蔭德)을 크고 무겁게 느끼게 됨을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 산정(山頂)에 올라 바람을 맞거나 바닷가 그칠 줄 모르는 파도의 출렁임 곁에 서 있으면 어르신들의 숨결과 간절한 어루만짐이 느껴지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신비가 온몸을 감싸는 경험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뿐, 저희는 아직 ‘역사’를 ‘사랑’하고 있지 못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뜯고 허물고 고치고 새 단장을 하는 일에 부지런합니다. 아무리 구겨진 삶에도 자손들 위한 사랑은 있는 법인데, 아니 자손들 사랑 때문에 구겨질 수밖에 없는 삶도 있는 법인데, 각박한 삶 살다 보면 더욱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는 그 자손들인데, 저희는 너무 잘나 그 아픔을 헤아리려 하지 않습니다.
●친구야, 우리가 먼저 고백하자
꿈을 준거로 해도 모자랄 지경에서 이미 지난 세월을 빙자한 ‘나 세우기’에 급급하다 보니 이것이 역사의식인지 몰라도 어르신들께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물결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용서하시옵소서. 새해에는 어르신네의 아픔을 헤아리면서 내일을 어제보다 중히 여기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감히 여쭈오니 기다려 주시옵소서.
친구야. 아직 살아 있구나. 건강하냐? 하는 일 별로 없을 거고, 자식들 풀풀 다 흩어졌을 거고, 돈도 넉넉지 못할 거 뻔하고, 몸인들 마음대로 움직일 턱이 없지. 그런데 그저 입만 살아서 올해도 또 작년에 하던 말 열심히 뱉고 살 작정이냐? 천하에 못된 놈들이라느니, 다 망했다느니, 내가 옛날에 일할 때는 이러지 않았다느니, 살아온 것이 허망하고 원통하다느니 하는 말 말이다.
그래, 모르지 않는다. 배신감에 짓눌린다는 것,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철저하게 자존심이 일그러진다는 것, 그런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잘 안다.
난들 별 수 있는 줄 아니? 하지만 올해는 입을 다물자. 그런 소릴랑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말자. 그리고 만약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삶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하자. 내 잘못, 그 치사한 의도적인 기만과 기획된 과오가 내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이 방법론적 정당성으로 자리잡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발언을 하자.
결과적으로 배부른 돼지가 되는 일이 삶의 꿈이었다는 부끄러운 고백도 빼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한 발언 후에도 할 말이 남았거든 그 때 얼마든지 욕하고 질책하고 화를 내도 늦지 않다. 친구야. 우리 올해는 그렇게 살자.
젊은 친구들. 나는 당신들을 신뢰하고 싶소. 아니, 그 일밖에 내가 할 일이 없소. 당신들을 불신하는 것은 그것이 꿈이라도 두려울 자학이오.
그렇게 내가 미련하게 살고 싶지는 않소. 나는 당신들의 사유가 단속적(斷續的)인 이미지의 점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불안해 하지 않으려 하오. 당신들의 시간과 공간이 가상과 현실을 모두 아우르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솔직히 말해 부러운 심정이오.
기존의 서술범주와 개념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든지, 아니면 그 적합성 없음을 논의조차 거절한 채 아예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든지, 당신들의 감성과 상상이 어제 우리의 이성이었다는 사실조차도 흔쾌히 수용하고 싶소.
●젊은 친구들! 무조건 믿고 싶소
어떤 모습으로 살든 당신들은 내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오. 하지만 ‘신(神)의 창조’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창조’는 이미 있는 것에 새것을 덧붙이는 작업이오. 그것만 기억해 주시오. 인간이 차마 오만할 수는 없기 때문이오. 새해에는 그렇게 살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소.
새해입니다. 두루두루 덕담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드리다 보니 아픈 독백이 되어버렸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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