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동라사 / 김은성 作
▲ 등장인물
임공우 재봉사. 정옥의 남편
강정옥 공우의 아내
성현기 공무원
고상호 군인. 공우의 동창
김갑원 전파사 주인. 공우의 후배
박승조 세탁소 주인. 공우의 제자
때
현대, 겨울
곳
강원도 홍천의 한 소읍(小邑) 시동(詩洞)에 있는 양복점
무대
무대는 '시동라사' 내부로 구성된다.
나무로 된 미닫이 출입문.
나무 창틀. 창밖을 향해 서 있는 마네킹 한 쌍.
우측에 다림대와 업소용 세탁기.
다림대 위에는 스팀다리미 두 대와 수북한 옷.
좌측에 옷감을 재단하고 재봉하는 재단대.
재단대 위에는 단추를 크기와 색깔별로 담아둔 깡통, 실통에 촘촘하게 감긴 다양한 색상의 실들, 여러 종류의 바늘들이 꽂혀 있는 바늘꽂이, 재단 가위, 초크, 여러 모양의 자, 세수 대야, 옷솔, 우마 등 자질구레한 도구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깔끔.
재단대 앞에는 수동식 재봉틀 한 대. 재봉틀 앞에는 소파와 탁자.
탁자 위에는 전화기, 재떨이, 주전자, 물 컵.
탁자 옆에는 작은 전기난로.
좌측 벽면에는 양복 옷감을 진열해 놓은 진열장. 그 속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산탄총.
진열장 위에는 양복 포장용 빈 상자들이 수북.
선반에 매달려있는 브룩실즈와 베에토벤의 초상화.
우측 벽면에는 세탁된 옷들을 걸어두는 옷걸이. 그 옆에 전신거울.
옷걸이 위에는 '시동상조회'달력과
'축 개업, 1985.4.7' 찍힌 유리 덮개에 금이 가있는 벽시계.
다림대와 재단대 사이에 살림방과 부엌으로 연결되는 쪽문.
쪽문 위의 벽면에 붙은 '정숙하라' 액자.
1
해질 무렵
어둑한 실내에 스며드는 노을.
임공우, 옷을 다리고 있다.
다림대 위에 쌓인 옷들.
바지 한 벌을 집어 든다.
쇠줄이 달린 디스코 풍의 바지.
임공우 이게 옷이야?
바지를 한 쪽으로 밀어버린 후 다른 옷을 집어 든다.
하얀색 와이셔츠.
다림질을 하다 말고
꼼꼼하게 살펴본다.
뒤집어서 메이커라벨을 찾아본다.
임공우 마에스트로?
솜씨는 좀 있네.
지문이 없어.
바늘 지난 길에 사연이 안 보여.
임공우, 고개를 돌려 휑한 재단대를 본다.
다리미를 놓고 다림대를 빠져나온다.
담배를 물고 출입문을 연다.
찬바람이 들어온다.
문을 닫고 다림대로 돌아온다.
다리미를 들다 말고 힐끔 시계를 본다.
신경질적으로 다림질을 한다.
잠시 후
강정옥, 군복을 들고 들어온다.
강정옥 춥다.
강정옥, 군복을 슬쩍 세탁기 앞에 놓는다.
임공우, 넌지시 군복을 들춰 명찰을 확인한다.
강정옥, 주머니 속에서 약봉투를 꺼낸다.
임공우, 약(신경안정제)을 받아 서랍 속에 넣는다.
강정옥 줄이래요. 김약국이.
임공우 ...
강정옥 하루에 한 알 넘기지 말라고.
임공우 그럼 두 알씩 넘길까.
영감탱이, 팔지를 말든가.
강정옥 ...
임공우 내일 뭐 있대?
강정옥 네?
임공우 고상사.
강정옥 홍천에서 조합장 취임식 있다고
임공우 어디서 만났어?
강정옥 약국 앞에서. 내일 아침까지 다려 달라고
임공우 또 관사까지 따라갔어?
강정옥 오늘 당직이라서 바쁘다고.
임공우 이 씨바랄 새끼를.
강정옥 민형이 엄마도 있었어요.
임공우 안 받는다니까. 받아오지 말라니까.
강정옥 알았어요. 알았어.
임공우 거, 군바리 새끼들하고 말도 하지마.
강정옥 그래도 당신 솜씨가 좋다고.
임공우 지미,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무슨,
평생 양복 한 벌 해 입을 줄 모르는 촌놈들.
강정옥 양복은 아무나 입나?
어울려야 입지.
임공우 (군복을 다림대 위에 펴며)
하긴, 고상사 이 멧돼지한테는 이 게 털이다. 지 털.
강정옥 둬요. 있다가 내가 할 테니까.
임공우 됐어.
강정옥 춥다. 김치죽 끓일까?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고.
임공우 장갑 끼고 다녀.
저번에 홍천 갔다 사다준 거 있잖아.
강정옥 김치죽 끓여요.
임공우 알아서 해.
강정옥, 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임공우, 군복을 다린다.
고상호,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임공우 충성! 근무 중 이상무.
고상호, 대충 거수경례로 답한 후 다림대 위에 놓여있던 군복 바지를 들어 주머니를 뒤진다.
고상호 휴, 여??네.
(음어표를 꺼내, 입고 있던 야전상의 속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고상호, 바지를 다림대 위에 놓으며 공우가 다리고 있던 상의를 살펴본다.
고상호 꽁우! 잘 하고 있나?
임공우 넉 줄 맞잖아? 저번에 내가 잡은 건데 뭐.
고상호 잘 좀 해봐 임마. 좀 색다르게. 맨 날 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임공우 군복이 거기서 거기지 뭐.
고상호 쫌 폼나게 해봐. 소매도 쫙쫙 각지게. 대충대충 하지 말고.
스팀 팍팍 줘 가면서...
임공우 근데 그거 뭐야?
고상호 뭐?
임공우 뭔데? 지갑?
고상호 넌 몰라도 돼.
임공우 수첩? 편지 같던데.
고상호 일급비밀이다.
임공우 비밀? 뭔데? 아, 좀 봐봐.
고상호 허허, 옷이나 다려.
임공우 오늘 당직이라면서? 애들 시키지. 뭘 이렇게 쌩돈을 들여.
고상호 몇 푼이나 된다고.
야, 꽁, 대한민국 육군이 옷이나 다리고 있어서야 되겠냐?
난 우리 애들, 원래 기집들이 하는 일은 안 시킨다.
임공우 왜? 취사병들도 있는데.
고상호 쯧쯧쯧. .그거랑 이거랑 같냐? 짜식이 군대를 갔다 와 봤어야 알지.
그리고 임마. 너 어려운 거 알어, 마.
중학교 동창인데 돕고 사는 거지.
요즘에 누가 양복을 해 입냐? 이 구석탱이에서.
부대에서 나오는 일감이라도 있어야 먹고 살지.
다 알어 임마.
아예 간판도 세탁소로 바꿔. 확실하게. 분명하게!
내가 아는 공무원들, 우체국, 면사무소...
여기저기서 일 팍팍 떼다 줄 테니까.
마, 오토바이 두고 뭐하냐? 시동, 북동, 서동, 남동...
하루에 두 번씩만 긁어모아도.
짜식이 야망이 없어. 넓혀봐. 임마. 넓혀. 남자는 말이야...
강정옥, 쪽문을 열고 나온다.
고상호 아이고, 강여사님!
강정옥 오셨어요. 바쁘시다고 하시더니.
고상호 하하하. 강여사 얼굴 다시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어째 점점 이뻐지십니다.
혹시 우리 콩우 몰래 연애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임공우 (버럭) 아, 옷 받을 때 주머니 확인 안 해?
강정옥 (고상호를 향해) 어머, 뭐가 딸려 왔어요?
고상호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하하. 제 마음이 딸려왔나 봅니다. 하하하.
시동의 모나리자 아니십니까? 하하하.
콩우야, 넌 좋겠다. 부럽다, 부러워. 하하하.
고상호, 지갑을 펼쳐 만원 지폐 두 장을 쓱쓱 꺼내 강정옥의 손에 쥐어준다.
강정옥 오천원이면 되는데.
고상호 괜찮습니다. 받아두세요.
팁입니다. 팁.
강정옥 저녁 아직 안 하셨죠?
김치죽 끓이는데 드시고 가세요.
고상호 괜찮습니다. 물이나 한 잔.
강정옥, 탁자위에 놓여있는 주전자와 컵을 들어 물을 따른다.
고상호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야, 일직병장 바꿔봐! 나야, 주임상사.
오늘 점호시간에 복장점검 할 테니까
전투복 A급부터 C급까지 전부 침상에 깔아놔.
전투모, 하이바, 명찰표, 주기표, 전부 체크 할 테니까
오바로크 및 수선 필요한 것들 조사해놓고,
그래, 그렇지.
이번 주말에 세탁소에 전부 맡길 테니까.
아, 시동라사.
이상. 금방 들어간다. 뭐? 말해봐, 임마. 뭐 사다줘?
쵸코파이? 순대? 이 새끼들이... 그래, 그래 알았어. 말해봐.
알았다. 알았어. 전투화 확실하게 닦아 놔라.
강정옥, 통화가 끝날 때까지 컵을 들고 기다린다.
고상호 (물을 마신 후) 잘 마셨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야, 꽁! 간다.
임공우 아, 뭔데?
고상호 뭐가?
임공우 편지.
고상호 비밀이라니까 그러네. 자꾸.
임공우 장난치지 말고.
고상호 이거 아무한테나 보여주면 안 되는 거야 임마.
강정옥 뭔데요?
임공우 봐봐. (고상호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고상호 (도망가며) 히히히.
(음어표를 꺼내 보여주며) 그래 편지다 편지. 절대보안.
임공우 그거 아니었잖아?
고상호,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 두더지 같은 새끼.
강정옥,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임공우, 다시 다리미를 잡는다.
물 대신 퉤웩~ 침을 뱉으며 군복을 다린다.
다림질을 하다 말고 서랍을 열어 약을 꺼낸다.
두 알을 삼킨다.
강정옥, 김치죽을 들고 나온다.
탁자 위에 상을 차린다.
강정옥 으흠, 맛있겠다. 잘 퍼졌네. 드시고 하세요.
임공우, 탁자 앞에 앉는다.
임공우 서운하겠네.
강정옥 ...
임공우 못 먹고 가서.
강정옥 맛있다. 얼큰하다.
임공우 둘이 참 잘 어울리데. 실실 웃으면서.
강정옥 먹어요. 식기 전에.
임공우 비밀이라도 있나봐.
강정옥 먹어요. 응?
임공우 왜? 아예 부대로 찾아가. 담 넘어서 들어가.
강정옥 왜 그래요. 또.
임공우 갔다 줘. 가서 떠 먹여줘.
임공우, 탁자를 엎는다.
2
새벽. 캄캄한 실내.
임공우, 소파에 웅크리고 있다.
정옥의 속치마를 코에 대고 자위를 하고 있다.
잘 되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며 한 숨을 쉰다.
강정옥, 쪽문을 열고 나온다.
임공우, 속치마를 소파 밑으로 숨기고 자는 척을 한다.
강정옥 언제 나왔어요?
임공우 ...
강정옥 들어와서 자요. 추운데.
임공우 왜 그렇게 자주 추워?
강정옥 겨울이니까.
임공우 난 안 추워.
강정옥 감기 걸려요. 들어가요.
임공우 5년 내내 추웠어.
임자 몸은 5년 내내 차가워.
강정옥 내 몸이 원래 좀 차잖아요. 수족냉증.
임공우 아니야.
기억나? 양조장 둘째딸 결혼식. 그날 밤.
강정옥 미영이 결혼식... 그 게 벌써 오년이 넘었지.
치수 다 재 놓고 선금까지 받아놨는데 일손 모자라서 혼났었어.
그 때는 홍천 간 승조도 있을 때였는데.
엄벙덤벙 한다고 당신한테 맨 날 혼나고, 그래도 참 착했는데.
맞다. 세탁소 옮긴다나 봐요. 춘천으로.
임공우 그 날 임자 몸은 따뜻했었는데.
밤 새 일하면서, 밤 새 안고. 일하다가 안고. 일하다가 하고.
강정옥 ...
임공우 장날이면 하루 종일 가게도 북적거리고.
홍천 장선생한테 기지 떼서 오는 길도 참 좋았어.
오토바이 뒤에 임자 태우고.
그러면 등이 참 따뜻했었는데. 한 겨울에도 말이야.
여름엔 수타사 들러서 물놀이도 하고.
강정옥 나 피아노 학원 끝나면 당신이 태우러 오고 그랬잖아요.
임공우 그 때야 수금일만 되면 돈다발이 쟁길 때 아니야.
강정옥 그 바쁜 와중에 그래도 할 건 다 하고 살았는데.
임공우 애가 안 생겨도 그 때는 걱정 없었는데.
강정옥 당신, 자꾸 고집부리지 말고 사람들 말대로...
우리 세탁소 한 번 해 보는 게 어떨까?
당신이랑 나랑 예전처럼 잘만하면...
임공우 사람들? 누구? 고상사? 그 새끼가 그래? 어떻게 홀기든?
왜? 할 거 못하고 사니까 지겨워? 간질간질해?
강정옥 내 말 좀 들어봐요.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잖아요.
양복을 누가 맞춰 입어요?
봐요, 당신 조수 그 찌질이 승조도 세탁소 차려서 잘 하잖아요.
홍천 가게는 동생한테 주고 춘천에 새로 짓는 아파트 사서 들어간대요.
당신 솜씨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달라졌어요.
그냥 사 입는 게 편하니까, 지금 사람들 귀찮은 거 싫어하잖아요?
임공우 왜, 피아노 학원 다시 다니고 싶냐?
강정옥 ...
임공우 홍천 바람 쐬고 싶어서 죽겠지?
너, 뒤에서 해 주는 거 좋아하잖아.
살랑살랑 흔들고 다니면서 누구랑 눈 마주칠라고?
강정옥 이불 갖다 줄게요.
임공우 이리 와봐.
강정옥 놔요.
임공우 니가 많이 굶었지? 나도 아주 죽겠다.
강정옥 놔.
임공우, 킁킁대며 강정옥의 몸 위에 올라탄다.
잠시 후 제풀에 지쳐 내려온다.
강정옥, 방으로 들어간다.
임공우, 흐느낀다.
3
아무도 없는 실내.
방 안에서 풍금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출입문 밖으로 부터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온다.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워지자 풍금소리 멈춘다.
강정옥, 방에서 나온다.
임공우, 산탄총을 들고 들어온다.
김갑원, 핏물에 젖은 자루를 들고 들어온다.
강정옥 오셨어요?
김갑원 집에 계셨어요? 낮에 날씨 좋았는데. 따땃스러운게.
임공우 (갑원에게 자루를 넘겨받아 정옥에게 건네며) 이거 손질해서 탕 좀 끓여. 갑원이랑 한 잔 할라니까.
김갑원 형수님, 그냥 두세요. 숨 좀 돌리고 제가 하겠습니다.
임공우 아, 됐어. 한두번 해 보는 것도 아닌데.
김갑원 그래도. 피 보면 놀라실까봐. 항시 창백스러우셔서.
강정옥 쉬세요. 벌써 물도 다 끓여 놨어요.
김갑원 아이고. 참 착하스럽기도 하십니다.
강정옥, 자루를 들고 쪽문으로 들어간다.
임공우 (산탄총을 진열대 속에 세우며) 아, 불곰 그 놈 찾아야 되는데.
김갑원 진짜 보긴 봤어요?
임공우 새끼가.
김갑원 아니, 너무 신기스러워서...
임공우 야, 산만 하더라. 산만해. 인상이 얼마나 고약한지. 한참을 멀뚱멀뚱 보다 가 쓱 지나가는데, 그 풍채가... 하긴 나라도 안 믿겠다. 진짜 봐야 알지.
분명히 지금쯤 겨울잠 자고 있을 텐데. 어디 숨어있을까.
김갑원 꼭 내가 따라 갈 때는 꿩 밖에 없어요. 서운스럽게.
임공우 너 저번에 멧돼지 도망가는 거 봤잖아?
김갑원 봤지요. 근데, 그 것도 그냥 고라니 큰 놈 아닌가 싶은데.
임공우 이 새끼가 같이 봐 놓고도 딴 소리하네.
김갑원 아니, 그 때 확실하게 못 봐서 그러지요. 멀리서 꽁무니만 보느라고.
얼핏 사슴스럽기도 하고.
임공우 너 앞으로 따라 오지 마.
김갑원 아니, 그 게 아니라.
임공우 그렇게 말을 해도 못 믿어.
사내놈이 담력이 없으니까 보일 게 안 보이는 거야.
김갑원 흐흐. 근데 아까 동굴계곡 지나는데 겁스럽데요.
뒤에서 곰 튀어나올까봐.
임공우 총 하나 알아봐줘?
너도 내 뒤만 쫄쫄 쫓아다니지 말고 한번 당겨봐야 할 거 아냐?
김갑원 총은 아무나 쏴요? 됐어요. 그냥 형님 구경하는 재미지.
히히히. 꿩들은 왜 대가리만 처박고 숨는 줄 몰라. 이상스러워.
임공우 (갑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치며) 마, 가서 술 받아와.
김갑원, 임공우에게 오천원 지폐 한 장을 받아 밖으로 나간다.
임공우 (쪽문을 향해) 여기 컵 좀 줘. 쥐포 두어 마리 꺼내오고.
임공우, 다림대 위에 놓인 양복을 살펴본다.
강정옥, 맥주 컵과 쥐포를 들고 나온다.
임공우 (양복을 보며) 누구야? 새 옷인데.
강정옥 오락실 최씨요.
임공우 기섭이?
강정옥 내일 조카 결혼식 간다고.
임공우 오늘 이 게 다야?
김갑원, 소주 댓병을 들고 들어온다.
임공우 갑원아, 너 장모님 환갑이 언제라 그랬지?
김갑원 명월 보름요.
임공우 그럼 슬슬 치수 재야되겠다.
김갑원 ...
임공우 너 마지막으로 해 입은 게 우주 돌잔치 때니까,
우주가 올해 입학했으니까, 아, 벌써 칠년이네 칠년.
김갑원 그러게요. 근데 통 입을 일이 없어요. 그 것도 장롱 안에 그대로 있는데.
임공우 이참에 하나 뽑아라. 명색이 장모님 환갑인데 사위들끼리 비교된다.
김갑원 우주엄마 외동딸이에요.
그냥 홍천 가서 식사나 한 끼니 할라고요.
강정옥 싸게 해 드릴게요. 저번에 봐둔 기지도 있잖아요.
(진열된 옷감들 속에서 하나를 펼쳐 보이며 김갑원에게 건넨다)
여기 밤색.
임공우 야, 잘 어울린다. 인물이 확 산다. 거울 봐봐.
김갑원 멋스럽긴 한데요. 요새 우주엄마가 영 힘스러워해요. 애 학원비다, 뭐다...
(옷감을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며)
담번에 갑철이 장가 갈 때나 한 번 봐야지요.
이 거 제가 찜입니다. 찜.
강정옥 하나 하시지. 잘 어울리시는데.
출입문이 열린다.
정장 차림의 성현기가 들어온다.
성현기 안녕하십니까?
임공우 (엉거주춤 일어나며) 어떻게 오셨어요?
성현기 휴식 중이셨던 것 같은데 실례 좀 범하겠습니다.
제 코트에 단추가 떨어져서요.
급하게 꿰맬 곳을 찾다가 마침 눈에 띄는 곳이 있어서 들어왔습니다.
임공우 (성현기의 코트를 살피며) 첫 단추구만.
강정옥 단추는 가지고 계세요?
성현기 아닙니다. 잃어버렸습니다.
강정옥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코트, 벗어 주세요.
성현기, 코트를 벗어 강정옥에게 건네준다.
강정옥, 재단대 위에 있는 단추통에서 알맞은 단추를 고른다.
성현기, 강정옥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
강정옥 (단추 하나를 내보이며) 이 거 괜찮으시겠어요?
성현기 아, 네, 꼭 같지 않아도 됩니다. 비슷한 것으로 달아주세요.
임공우 비슷하면 되나, 딱 맞아야지.
임공우, 단추를 찾아 강정옥에게 건넨다.
강정옥, 바느질을 시작한다.
성현기, 실내를 둘러보면서 곁눈으로 강정옥을 본다.
임공우 (코트를 가리키며 김갑원에게) 요즘 옷들이 이 게 문제야.
뭔 놈의 단추들이 그렇게 잘 떨어져.
기계가 만들어?그런 거거든.
단추보다도 구멍이 중요하거든. 이 게 어슷해야 된다고.
근데 봐봐. 이거 봐, 무식하게 일자로 짝 찢어 놓으면 되냐고. 답답해.
거, 옷 잘못 샀어요.
성현기 네? 아, 양복일 하신지 오래 되셨나 봐요?
김갑원 20년도 넘었어요.
성현기 요즘 양복점이 흔치 않은데...
얼핏 보기에도 사장님 경륜이 대단해 보이십니다.
김갑원 아이고,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이 형님, 원좁니다, 원조.
임공우 끄음... 여기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
성현기 아, 출장을 좀 왔습니다.
김갑원 (쭈뼛거리며) 느낌스러움으로 봐서 높으스러우신 분 같은데.
성현기 아, 아닙니다.
임공우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 임공우라고 합니다.
성현기 네, 성현깁니다.
강정옥, 성현기를 본다.
임공우 좀 앉으세요.
성현기 네. (소파에 앉는다)
김갑원 저, 소주라도 한 잔... (성현기에게 잔을 내밀며)
성현기 괜찮습니다.
임공우 (김갑원에게 눈짓을 보내며) 치워, 마.
김갑원, 컵과 소주를 탁자 한 쪽으로 치운다.
임공우 (성현기에게 담배를 권하며) 담배?
성현기 아, 괜찮습니다. 끊고 있는 중이라서.
임공우 저... 요즘 옷이 말입니다... 그럼 음료수라도?
(갑원에게) 가서 마실 것 좀 사와.
성현기 괜찮습니다.
김갑원 (일어서며) 뭘로 사와요?
임공우 마, 많잖아. 박카스, 아니, 그 뭐야, 비타민 그 거 좋드라.
김갑원,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 흠, 요즘 옷이 말입니다.
예전에 수공으로 제작했던 옷이랑은 많이 다릅니다.
품격도 떨어지고, 봉재도 거칠고요. 기계가 오리고 붙이는데 당연하지요.
성현기 아, 그럼 사장님은 전부 손수 만드십니까?
임공우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자르고 꿰맵니다.
디자인부터 초크 칠, 재단, 재봉, 예비단추까지 빈틈이 없지요.
(강정옥을 보는 성현기의 시선을 의식하며)
수선하는 일은 집사람이 하기도 합니다.
처음엔 일손이 부족해서 도와주다가...
지금은 단추만큼은 오히려 저보다 낫습니다. 하하.
일거리가 많을 때는 제자도 키워 보기도 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인내심이 부족해서요. 이 녀석들이 견디질 못해요. 하하.
성현기 대단하십니다. 사장님같은 장인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임공우 감사합니다.
성현기, 대화중에 힐금힐금 강정옥을 본다.
강정옥, 바느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성현기를 본다.
잠시 둘의 시선이 만난다.
임공우 주로 양복을 많이 입으실 것 같은데?
성현기 네? 아, 그런 편이지요. 네.
임공우 하시는 일이?
성현기 ... 공무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임공우 아, 국정에 적을...
성현기 뭐, 대단찮은 일입니다. 하하.
임공우 흠... 홍천에서 오셨습니까?
성현기 춘천에서 왔습니다.
임공우 아... 네.
김갑원, 드링크 몇 병을 들고 들어온다.
임공우 (뚜껑을 따 성현기에게 건네며) 드시지요.
성현기 고맙습니다.
강정옥, 바느질을 끝내고 일어난다.
강정옥 (코트를 성현기에게 건네며 고개 숙인다.) 다 됐습니다.
성현기 (강정옥의 얼굴을 응시하며) 감사합니다.
강정옥,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임공우 흐, 저 사람이, 입혀드려야지.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성현기 괜찮습니다.
임공우 아닙니다. 주십시오.
임공우, 성현기에게 코트를 입혀주고 단추까지 직접 채워준다.
성현기 감쪽같네요. 티가 전혀 안 납니다.
얼마죠?
임공우 됐습니다. 오늘은 그냥 가세요.
성현기 (만원 지폐를 내밀며) 받으세요.
임공우 아휴, 다음에 주세요.
성현기 정 그러시다면... 잘 입겠습니다.
임공우 춘천 가시기 전에 놀러나 한 번 오십시오.
기지 구경도 좀 하시고.
김갑원 나중에 양복 한 벌 하러 오세요.
성현기 하하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임공우 또 뵙겠습니다.
성현기 (나가려다 말고 슬쩍 쪽문을 보다가) 저기... 아닙니다.
그럼.
성현기, 인사하고 나간다.
임공우와 김갑원, 문 밖까지 나가 인사한다.
김갑원 인물도 훤칠스러운게. 야, 자가용도 겁스럽게 고급스럽네요.
임공우 하필이면 춘천이냐.
홍천만 됐어도 확실하게 잡아보는 건데.
김갑원 춘천? 뭐하는 사람이래요?
임공우 술이나 따, 임마.
임공우, 다리미를 눌러 쥐포를 굽는다.
임공우 (다림대 위의 양복을 보며) 기섭이 이새끼. 올 겨울에는 꼭 한 벌 해 입 는다고 알랑방구 뀌더니만 어디 가서 사 입었어.
김갑원 한 잔 받으세요. 형님.
임공우 (쥐포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넌 절대로 사 입지는 말아라.
김갑원 살 돈도 없어요.
임공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임마. 양복은 맞춰 입는 거야.
너, 돈 없어서 그러는 거면 내가 외상으로 해 줄 수도 있어.
(한잔 들이킨 후 갑원에게 잔을 건네며)
우선 한 벌 해 입어. 돈은 차차 주고.
김갑원 아, 형님. 제 성격 아시면서. 제가 돈스러운 건 좀 정확스럽잖아요.
임공우 내가 월부로 해줄게. 일년, 응? 한 달에 만오천원씩. 인심썼다.
김갑원 아이고, 저랑 우주엄마는요, 절대 할부는 안 해요.
임공우 잘 한번 생각해봐 임마. 안타까워서 그래. 안타까워서.
좋은 옷 한번 입혀보고 싶어서.
김갑원 하긴요, 옛날에는 다 맞춰 입었지요. 구두도 양화점가서 맞췄으니까.
직접 가죽도 고르고, 모양도 고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재미도 있었 는데. 지금은 죄다 없어졌잖아요. 양화점, 양장점, 양복점. 형님도 아시잖 아요? 홍천양복점, 리바이스 대리점으로 바뀐 거.
임공우 홍천양복점, 그 인간이야 원래 사기꾼이야, 사기꾼.
그리고 임마. 양복점이 아니라 라사야, 라사.
우리는 절대 양복점이라고 안 해.
김갑원 맞다. 전부터 궁금스러웠는데요, 라사가 무슨 뜻이래요?
임공우 이 라사가 원래 포도아 놈들 말이거든.
김갑원 포도?
임공우 너도 참 섭섭하다. 전파사 한다는 놈이 전파가 파바박 해야지.
자주 끊긴다. 응? 마, 포도아라고 있어. 구라파는 알지? 그 스페인 밑에 폴투칼이라고 있어. 그 볼 잘 차는 애, 그 놈 누구냐? 피고? 마구? 암튼, 그 나라 있어. 걔들이 한 참 잘나갈 때는 배타고 다니면서 땅덩어리 다 먹었었거든. 그 때 그 애들이 입고 다녔던 양복이 끝장났던 거거든.
김갑원 아. 그니까 걔들 말로 양복이 라사다?
임공우 그렇지. 우리는 절대 양복점이라고 안 한다. 라사가 정통이다
김갑원 나는 나사가 뭔가... 도라이바랑 연관이 있나...
알고 보니까 재미스럽네요.
임공우 말이 나온 김에 작고하신 나의 스승이 누구시냐 하면, 구자태 명인이라 고, 이분이 원래 전라도 벌교 분이거든. 원래 소리하는 집에서 태어나셔 서 어렸을 때는 음악을 좀 하셨나봐. 예술가 기질을 타고 난 거지.
김갑원 근데 어떻게 양복일을? 아니 라사일을?
임공우 그 게 전설이야, 전설. 동경에 유학 간 삼촌 만나러 갔다가 기술을 배웠 다는 설, 서울 유명한 라사에 양자로 들어갔다는 설, 독립운동 자금 댈라 고 일을 시작했다는 설, 너, 김구선생 알지? 김구 선생이 만주에서 고생 할 때 그분이 양복 만들어서 찾아갔다는 말도 있어. 뭐, 워낙 신화적인 분이라서. 아무튼 왜정시대부터 재단의 고수, 재봉의 달인. 뭐 전국구 스 타가 된 거지. 일본 본토에서 스카웃 들어왔을 정도니까 말 다했지.
김갑원 그 분한테 직접 배우신 거예요?
임공우 그렇지. 내 동기들만 열 명. 위로 선배들이 다섯 명 됐고.
춘천 명동 사거리, 로얄라사! 죽여줬었다.
김갑원 지금도 있어요?
임공우 스승님 돌아가시고, 우리들 다 독립해 나왔으니까. 지금은 없지.
한잔 따라봐 임마.
요즘 애들은 모른다.
옷에는 지문이 있어야 된다.
옷에는 사연이 깃들어야 한다.
스승님이 그러셨다.
단추 하나를 달 때도
실밥 하나를 맺을 때도
고객의 호흡을 느껴라.
치수 잴 때의 떨림을 기억해라.
바늘 지난 길에 혼을 담아 보내라.
그래야 옷은 날개가 된다.
고상호,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깨에 군용더블백을 매고 있다.
김갑원 충성!
고상호 니들 또 사냥 갔다 왔냐?
김갑원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고상호 냄새가 딱 꿩탕이구만 뭐.
김갑원 역시 귀신스러우십니다.
고상호 조심해라. 우리 애들한테 걸리면 얄짤 없다.
무장해제 시켜서 영창에 넘겨버릴 테니까.
임공우 애들 보초 설 때 조는 거나 잘 감시해.
개구리들 땅, 밟기도 싫으니까.
고상호 (더블백을 재단대 위에 내려놓으며) 강여사님!
임공우 (더블백을 다림대 위로 옮기며) 뭔데?
강정옥, 쪽문을 열고 나온다.
강정옥 오셨어요?
고상호 우리 애들 수선할 옷들입니다.
오바로크 할 것들도 좀 있고요.
꽤 됩니다.
강정옥, 더블백 속의 군복들을 꺼낸다.
고상호 야, 우주전파사. 야, 김갑원.
가게는 어떻게 하고 여기 와있냐?
김갑원 우주엄마 있는데요, 뭐.
고상호 그래도 그 게 아니다. 전구 하나 팔더라도 주인이 가게를 지켜야지.
요새 먹고 살만은 하냐?
형광등 몇 개 팔아가지고 짬밥 짓기도 힘들 텐데.
김갑원 그냥, 공사거리 있으면 출장 나가고 그러지요 뭐.
전에는 참 고칠 것들이 많았는데. 동네에 테레비 몇 대랑 라디오 몇 대 밖에 없었어도 이상스럽게 고칠 게 많았거든요.
갈수록 일거리가 줄어요.
고장이 안 나게 만드는지.
고칠 생각들을 안 하는지.
고상호 우리 애들 짤순이나 와서 고쳐라.
김갑원 탈수기요?
고상호 응. 모터가 나갔는지 안 돌아간다.
김갑원 그 거 모터 요즘 찾기 힘든데.
강정옥 고상사님, 이 거 언제까지...
고상호 모레가 검열이니까요, 내일 저녁에 가지러 오겠습니다.
임공우 애들 보내. 직접오지 말고.
고상호 사병들이 부대 밖으로 어떻게 나오나?
임공우 다른 심부름은 잘도 시키더라.
(강정옥에게) 아직 멀었어?
강정옥 다 됐어요.
강정옥,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임공우 바쁘니까 앞으로는 가지고 오지 마.
고상호 바뻐? 왜, 이참에 꿩 장수로 나설라고?
임공우 너 좀 오지 말아라. 양복 한 벌 해 입을 줄 모르는 놈이 무슨,
고상호 양복? 어디서? 양복을 어디서 해 입어? 여기서?
(진열대를 가리키며) 저 기지들, 곰팡이 안 슬었냐?
내가 알기로 오년 동안 이 집에서 양복 맞춰 입고 나간 사람 없었는데.
요즘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양복을 맞춰 입냐? 사 입지.
있다고 쳐. 그래, 있다고 치자.
너 요즘 유행 따라갈 능력은 있냐?
요즘 임마, 쓰리버튼 아무도 안 입어.
임공우 (산탄총을 집어 들며) 멧돼지 같은 새끼가.
고상호, 몸을 웅크리며 순식간에 재단대 뒤로 숨는다.
김갑원, 임공우를 말린다. 산탄총을 잡는다.
김갑원과 임공우 실랑이를 벌인다.
강정옥, 놀라서 뛰쳐나온다.
고상호 (출입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쏴. 쏴봐. 너 자식아, 고작 꿩 밖에 못 잡지? 그래, 운 좋으면 멧돼지까지는 어떻게 되겠다.
너, 사람 겨눠봤어? 난 자식아, 강릉무장도발 참전 용사야.
당장 공비라도 만나면 오줌이나 흘리고 있을 새끼가. .
마누라 인물이 아깝다. 지 주제를 알아야지. 어디서 한량 행세를 해.
고상호, 나간다.
김갑원 형님이 참아요.
김갑원, 산탄총을 빼앗아 제자리에 놓는다.
임공우, 소파에 앉아 벌컥벌컥 소주를 들이킨다.
임공우 : (강정옥에게) 뭘 보고 서있어?
강정옥,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김갑원 상호 형님 성격이야 원래 그렇잖아요. 군인스러우니까.
한 잔 쭈욱 드시고 털어 버리세요.
임공우 너 맞출거냐? 안 맞출거냐?
김갑원 ... 아이 참.
임공우 니가 보기에도 저 사람 인물이 아깝냐? 그렇게 생각하냐?
김갑원 허허 참.
임공우 하나 맞춰라. 그 게 그렇게 힘드냐?
강정옥, 쪽문을 열고 나와 냄비를 탁자 위에 놓는다.
김갑원 자자, 꿩탕이 나왔습니다.
자, 형님 한 잔 받으시고.
형수님. 이 게 말입니다.
아까 형님이 파방, 기냥 한 방에 잡은 거 거든요.
그 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거든요.
손에 감촉스러움이 감각스러워야 되거든요.
형님 손끝이야, 바늘로 다져진 예민스러움이거든요.
임공우, 숟가락을 들어 꿩탕을 먹는다.
몇 숟가락 들다가 인상을 찡그린다.
돌이라도 씹은 듯, 뱉어낸다.
임공우 뭐야 이거?
김갑원 어, 총알이네.
4
임공우, 재봉틀 앞에 앉아서 군복에 계급장을 달고 있다.
강정옥, 다림대 앞에서 군복을 수선하고 있다.
임공우, 기지개를 켠다.
다시 재봉틀을 돌리려다 말고 일어난다.
문가에 기대서서 밖을 본다.
강정옥 바람 좀 쐬고 와요.
혼자서 해도 저녁까지는 마칠 수 있으니까.
임공우, 대답 없이 다림대로 간다. 서랍을 열어 약을 꺼내 먹는다.
다시 재봉틀 앞에 앉는다.
문이 열린다.
성현기가 사과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성현기 안녕하십니까?
임공우, 벌떡 일어난다.
임공우 오셨습니까?
성현기 네, 돌아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임공우 (강정옥에게) 뭐해? 인사드려.
강정옥,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임공우 집사람입니다.
성현기 (강정옥에게 바구니를 건네며) 부사입니다.
임공우 그냥 오셔도 되는데.
성현기 아닙니다. 어제 너무 감사했습니다. 당연히 그 마음에 보답을 해야지요.
임공우 진정한 신사이십니다. 단추 하나 잊지 않고.
(성현기가 입고 있는 코트를 살피며) 단추는 괜찮으시지요?
성현기 네, 덕분에 끄떡없습니다.
그런데 이참에 단추를 싹 다시 달았으면 합니다.
임공우 네?
성현기 확실히 차이가 나서요.
만져보세요. 헐렁헐렁 한 게 곧 떨어질 것 같아서요.
(코트를 벗어서 강정옥에게 건네주며)
나머지 것들도 바느질을 다시 해 주십시오.
임공우 그렇지요? 확실히 차이를 아시겠지요?
단추 하나를 달더라도 모직 종류에 따라서, 입는 사람 체격과 성격에 따 라서 다르게 달아야 되거든요.
공장에서 나오는 판박이 옷들은 꿈도 못 꿔요.
강정옥, 바느질을 시작한다.
임공우 (강정옥에게 다가가며) 가만, 내가 직접...
성현기 사장님, 죄송합니다만, 마실 것 좀. 어제 드링크, 그 거 좋던데.
임공우 아, 예. 그치요? 입맛도 뭔가 아시네. 기다리세요. 얼른 사다 드릴 테니까.
임공우,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성현기 강정옥... 정옥이 맞지?
강정옥 ...
성현기 맞지요?
나야. 현기. 홍일고 기악부 성현기.
홍일여상 합창부 강정옥.
... 어제 너도 나 알아봤잖아?
강정옥 거기 소파에 앉아요.
성현기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이 게 얼마만이야. 반갑다.
강정옥, 반응 없이 계속 바느질을 한다.
성현기 밤새 한 숨도 못 잤어.
어떻게 사나 궁금했었는데.
통 니 소식을 아는 애들이 있어야지.
강정옥 가서 앉아요.
성현기, 소파에 앉는다.
성현기 그냥 아는 체 할까 하다가 너 난처해 질까봐.
강정옥 (바느질을 하며) 성공했나 봐요. 좋아 보여요.
성현기 그래? 다행이다. 나 많이 늙었지?
넌, 여전해.
강정옥 여전히 깔끔하시네요.
결혼은 하셨을 테고, 애는?
성현기 응. 남매야. 중학교 다니고. 지들 엄마랑 서울에 가있어.
넌? 아직 없는 것 같던데.
강정옥 ...
성현기 그래서 아직 처녀 같구나.
강정옥 동창들은 자주 만나요? 하긴 학생회장이셨으니까.
성현기 다 그럭저럭 살아. 나이 먹는 게 그렇지 뭐.
너 노래 정말 잘 했었는데, 풍금도 잘 치고.
난, 너 가수 될 줄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모습, 너랑 안 어울린다.
화가 나.
마음이 아파.
강정옥 (출입문 밖 임공우가 오는 모습을 보고) 와요. 얼른 앉아요.
성현기 연락해.
성현기, 품속에서 급히 명함을 꺼내 강정옥의 손에 쥐어주고 소파에 앉는다
임공우, 드링크 두 박스를 들고 들어온다.
임공우 (뚜껑을 따서 건네며) 드세요.
성현기 뭘 이렇게 많이 사오셨습니까?
임공우 별 것 아닙니다. 가지고 가십시오.
(강정옥에게 가서) 나와 봐. 내가 할라니까.
임공우, 바느질을 시작한다.
성현기 (드링크 뚜껑을 따서 강정옥에게 건네며) 드시지요.
(뚜껑을 따서 임공우에게 건네며)
사장님, 잃어버린 첫 단추를 이십년이 넘어서 다시 찾았습니다.
임공우 네?
아, 네에. 과찬의 말씀입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기지 구경 좀 하세요.
저기 저, 검정색 보이시지요?
그 게 제일모직 최고급이거든요.
쭉 한번 보세요.
(강정옥에게) 뭐해? 안내 좀 해드려.
임공우, 빠른 손놀림으로 바느질을 한다. 능숙한 솜씨를 뽐낸다.
성현기, 강정옥과 시선을 교환한다.
출입문이 열린다. 술에 취한 고상호가 들어온다.
고상호 다 됐습니까?
나 우리 새끼들 보따리 찾으러 왔습니다.
야, 꽁! 화 좀 풀렸냐?
술이나 한 잔 하자.
꿩탕 안 남았냐?
강정옥 아직 좀 덜 됐어요.
두세 시간만 있다 오세요.
임공우 그래, 지금 바쁘니까 있다가 와.
고상호 아이고, 강여사님, 제가 한 잔 했습니다.
임공우 (버럭) 있다가 오라니깐.
고상호 (성현기를 발견하고) 어이쿠.
(매무새를 다듬고) 충성!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국장님.
성현기 누...구?
고상호 도청 도시국장님 아니십니까?
저, 아까 인사 올렸던 2대대 고상호 주임상사입니다.
성현기 아, 아. 아까 '모나리자'불렀던 분.
고상호 기억하시는군요? 영광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 잔 했습니다.
성현기 그럼요. 괜찮습니다. 드실만한 자리였는데요 뭐.
고상호 연대장님이 저를 극진히 총애 하시는지라.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왔습니다.
성현기 잘 하셨습니다.
고상호 야, 이거 국장님이랑 저랑 보통 인연이 아닌 가 봅니다.
실은 전번 홍천 조합장님 취임식 때도 뵌 적이 있습니다.
성현기 아, 그러셨어요.
고상호 잘 부탁드립니다. 근데 이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로?
성현기 두 분 친하신가 봐요?
고상호 임꽁우라구요. 제 쫄병입니다.
성현기 네? 아, 사장님 성함이...
고상호 꽁우라고도 하고 콩우라고도 합니다. 저 놈이 어렸을 때부터 꽁한 성격 이 있거든요. 근데 또 농고 다닐 때는 콩까기 선수였거든요, 저놈이.
그래서요... 히히히.
성현기 하하하.
고상호 저, 국장님, 어떠십니까? 제가 오늘 밤 한 번 모시고 싶은데요.
성현기 아니, 괜찮습니다. 곧 가봐야 합니다.
임공우,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상호를 가게 밖으로 끌어내려 한다.
임공우 가, 가 이 새끼야.
어디서 개구리 새끼가 술주정이야.
고상호 왜이래? 어, 어. 안 취했어. 어? 어.
임공우와 고상호, 실랑이를 벌인다.
강정옥, 성현기에게 코트를 건네며 가달라는 눈짓을 보낸다.
성현기, 코트를 다시 재단대 위에 놓는다.
성현기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임공우 다 됐는데.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성현기 아닙니다.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왕 손봐주시는 김에 쫙쫙 한번 다려주십시오.
다시 와서 찾아가겠습니다.
임공우 그래도, 춘천이신데.
성현기 홍천에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요. 괜찮습니다.
고상호 다음에 오시면 꼭 연락 한 번 주십시오. 식사 한 번 모시겠습니다.
일전에 명함 드렸었는데.
성현기 아, 네.
임공우 참, 선생님. 저, 명함 있으면 한 장 주시고 가시면...
성현기 (주머니 속을 뒤지는 척 하다가) 아, 이거 어떡하죠? 지금 없는데.
임공우 괜찮습니다. 또 오실 텐데요. 뭐.
성현기 (강정옥을 향해 인사하며)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성현기, 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와 고상호, 따라 나가 인사한다.
임공우 급히 다시 들어와 드링크 박스를 들고 나간다.
자동차 떠나는 소리.
이어지는 고상호의 "충성" 소리.
뒤이어 들리는 임공우와 고상호가 싸우는 소리.
강정옥, 문가에 기대서서 그 모습들을 지켜본다.
5
눈에 멍이 든 임공우, 소파에 앉아있다.
김갑원,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김갑원 형님, 갈 거면 빨리 갑시다.
형수님 계시니까 괜찮스럽잖아요.
임공우 오늘도 안 오시려나... 내일이면 일주일인데...
김갑원 전화 한 번 해 보세요.
임공우 번호를 모르니까...
김갑원 아, 도청에 전화해서 물어봐요.
임공우 그럴까? (전화기를 잡으려다가) 아니다.
마, 가게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 테니까.
김갑원, 나간다.
임공우,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림대 앞 옷걸이에 걸어진 성현기의 코트를 물끄러미 본다.
코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선다.
임공우 (거울을 보며 혼잣말) 도시국장이 뭐하는 자리야?
연대장 친구에, 조합장 후배에, 국회의원 선배에... 좋겠다.
사람이 참 신사야, 신사.
강정옥, 쪽문을 열고 나온다.
임공우, 코트를 벗는다.
산탄총과 사냥장비를 챙기고 라이방을 쓴다.
강정옥 산에 가게요?
임공우 혹시라도 국장님 오시면 얼른 갑원이 핸드폰으로 연락해.
금방 올 테니까. 오늘은 깊이 안 들어갈라니까.
강정옥 갔다 오세요.
임공우, 나간다.
강정옥, 다림대 앞에 앉아서 다림질을 시작한다.
잠시 후 문밖에서 오토바이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강정옥, 다림질을 멈추고 전화기를 본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는다.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본다.
명함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고 탁자 위에 놓여있던 사과 하나를 통째로 베어 먹는다.
반쯤 남은 사과를 탁자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방 안에서 풍금소리가 들려온다.
계속되던 풍금소리, 고조될 때 출입문이 열린다.
성현기가 들어온다.
성현기, 서있는 채로 풍금소리를 듣는다.
강정옥이 먹다 남긴 사과를 손에 들고 본다.
풍금소리 멈춘다.
강정옥, 쪽문을 열고 나온다.
성현기를 보고 흠칫 놀란다.
성현기 여전하구나. 풍금소리...
강정옥 오셨어요. (성현기의 손에 들린 사과를 보고) 주세요.
성현기 부사 좋아하는 것도...
사과에 남는 이 이 자국, 내가 얼마나 귀여워했었는데.
강정옥, 사과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린다.
강정옥 (코트를 건네며) 여기.
성현기 이야기 좀 해.
강정옥 무슨 이야기요?
성현기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강정옥 왜요?
성현기 듣고 싶어.
강정옥 이야기... 그 게 이야기로 될 것 같아요?
성현기 알아, 니 마음. 나 다 알아.
강정옥 손님!
성현기 나 고민하고 왔어. 그냥 온 거 아니라고. 마음먹고 왔어.
강정옥 현기오빠!
성현기 군대 가서 니 생각 많이 했었어. 다시 찾아야겠다고.
넌 내 여자라고.
강정옥 가세요.
성현기 제대 하던 날, 너 시집갔다는 말 들었어. 부자한테 잘 갔다고.
글쎄... 못 믿겠지만 네가 보낸 편지들, 가끔 꺼내서 읽었어.
원죄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강정옥 장난 그만 쳐요.
성현기 그 눈 오던 날, 기억나지? 신촌 내 자취방.
강정옥 남편한테 전화 할까요?
성현기 (정옥의 손을 잡으며) 정옥아, 나를 봐.
어떻게든 보상하고 싶어.
지난 일주일 동안 견딜 수가 없었어.
이런 촌 바닥에서 그런 수준 낮은 인간들이랑 어울릴 니가 아니야.
다 나 때문이야.
강정옥 저도 수준 낮아요. 원래 낮았잖아요. 상고 나온 가난한 년.
성현기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 이제야 용서를 빈다.
강정옥 (창밖을 살피며) 일어나요.
성현기 그 날 바이올렛에 못 나갔던 건 어쩔 수가 없었어.
강정옥, 소파에 주저앉는다.
강정옥 가요. 어지러워.
성현기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강정옥 뭐가요?
성현기 애 없는 거.
남편 때문이니?
그 때 내가 미쳤었어. 네 말대로 아이 낳았으면 지금 우리 둘 다 행복했 을 텐데. 어떻게 갚아야 하니? 응?
강정옥 미쳤어.
편지에 썼잖아요? 잊어라. 잊겠다.
딱 여섯 글자. 보여줘요?
다 잊었잖아? 나도 다 잊었어.
가, 가.
성현기 (강정옥을 끌어안으며) 미안하다, 사랑한다.
강정옥 놔. 놔.
전화벨이 울린다.
강정옥 (목소리를 가다듬고) 네. 네.
아, 지금 막 왔다 가셨어요.
네.
네.
전화할 시간도 없었어요.
잡았는데, 바쁘다고 하셔서요.
연락처 받을 틈도 없었어요.
네. 안 주고 가셨어요.
네...
강정옥,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정옥 가세요. 곧 들어올 거예요.
성현기 연락해.
강정옥 연락할 시간 없어요.
성현기 해. 꼭해. 너도 바라고 있잖아.
강정옥 아니요. 미싱 돌리고, 다림질 하고, 꿩 잡고, 토끼 잡고!
시간 없어요.
성현기 할 말이 남아있어.
강정옥 그 사람 곧 와요.
성현기 그 사람은 나 아니?
강정옥 네?
성현기 내가 난 줄 아냐고?
강정옥 그 게 무슨 말이에요?
성현기 내 마음 모르겠어?
내 눈빛 보면 모르겠어?
강정옥 미쳤지요?
당신 부인, 이러는 거 알아요?
성현기 나, 그 여자랑 곧 이혼할거야.
강정옥 오빠... 공무원이라면서요?
성현기 사랑하는데,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을 찾았는데, 어떡해, 그럼?
강정옥 그래도 되요?
성현기 세상은 달라졌어.
공과 사만 분명하면 돼.
강정옥 이제 정말 가세요.
성현기 기억해. 다시 찾은 첫 사랑, 이제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절대로.
강정옥, 다림대 앞에 앉아 다림질을 시작한다.
성현기, 코트를 들고 나간다.
자동차 떠나는 소리 들려온다.
얼마 후 오토바이 소리 다가와 멈춘다.
임공우,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임공우 (잔뜩 화가 나서)
아, 그냥 가 버리신 거야?
아, 전화를 했어야지!
사람이 수완이 없어, 수완이.
고상사 그런 새끼들한테는 눈웃음도 잘도 치고 다니 두만.
그 몇 분을 못 잡아 놔.
차라도 한 잔 끓여주면서,
이런저런 말도 좀 걸어보고.
참 답답하네. 답답해.
일주일 동안 나 속 타들어가는 꼴 못 봤어?
강정옥, 운다.
임공우, 속상한 표정으로 약을 꺼내 먹는다.
임공우 아, 울지 마.
못해 먹겠다. 못해 먹겠어. 이놈의 라사.
기지 쨀 날 다시 한 번 안 오는 거야?
초크 갈아 낄 날 다시는 안 오는 거야?
개놈의 공무원 새끼.
기생오라비 같은 게 맞출 듯 안 맞출 듯 어긋어긋 하더니만.
임공우, 전화를 건다.
임공우 갑원이냐, 빨리 나와 임마.
다시가야지.
곰 잡으러 간다.
내가 불곰 그 놈 꼭 찾고 만다.
6
임공우, 고상호, 김갑원이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고상호 하하하, 멧돼지를 잡어? 꽁우가 멧돼지를! 하하하.
살다 보니까 별 돼지같은 일이 다 일어나는구나. 햐.
임공우 딱 니 같은 일이 벌어 진거야, 임마.
김갑원 (고기를 씹으며) 와, 살살 녹네요. 녹아.
임공우 많이 먹어라. 임마. 이 거 돈 주고도 못 사 먹는 거다.
고상호 근데 확실히 딱총으로 잡은 거 맞어?
김갑원 참나, 형님도. 제가 봤다니까요.
임공우 넌, 아까 대가리에 총알구멍 봐 놓고도 그러냐?
고상호 그거야, 죽어있는 놈. 팡, 하고 쐈을 수도 있고.
갑원이 너 확실히 봤어? 보니까 아주 날쌘 놈 같더만.
(고기를 집어 먹으며) 요놈이 요게, 다 큰놈이 아니라 새끼라고, 새끼.
덫에 걸렸든가, 어디가 아픈 놈이었든가, 응? 공기총 한 방에 쉽게 잡힐 놈이 아니야.
임공우 또 술맛 떨어지게 한다.
맛없으면 가, 임마.
고상호 맛은 있다.
있다 갈 때 좀 싸줘. 야, 꽁. 불알은 내꺼다.
내가 임마, 운전병 데리고 배차 안했으면 싣고 오지도 못했다.
김갑원 돼지 불알 갖다가 뭐하게요? 소불알이면 몰라도.
고상호 이 자식이 또 뭘 모르네. 그 거 쫙쫙 찢어가지고 연탄불에 구워봐, 임마. 그 냄새가! 야, 동네 개새끼들도 대문 앞에 줄을 서. 줄을. 응? 눈이 씨뻘 개져가지고 한 접 받아먹기 전에는 꿈쩍도 안 해, 임마.
임공우 찢어 먹든, 볶아 먹든, 알아서 많이들 잡수세요.
김갑원 야, 아까 형님. 그 순발스러움, 캬,
새마치 막 지나서 얼마 올라가지도 않았어요. 이 게 갑작스럽게 팍 튀어 나오는 거예요. 우리 쪽으로 막 달려오다가, 순간스럽게 탁 멈추더라고 요. 그 때 형님이 파방! 햐, 콱 꼬꾸라지는 게. 크.
임공우 됐어, 됐어. 야, 잔 비었다.
고상호 그 멍은 왜 그렇게 안 빠지냐? 봐봐. 내가 후 해줄까?
임공우 아, 됐어.
고상호 음마, 쌍안경 만들어 줄까?
임공우 콱, 조심해라. 저번엔 참은 거다.
고상호 어쭈. 재대결 한 번 할까? 리턴매치.
임공우 (쪽문을 향해) 여기! 고기 좀 더 가져와!
고상호 근데 국장은 이제 안 오나?
임공우 올 일이 뭐가 있겠어?
고상호 마, 양복 한 벌 해드린다고 설레발 좀 치지.
그냥, 일단 만들어 드린다고, 마.
그럼 그 양반이 돈 안 주겠냐?
임공우 됐어. 먼저 해 입는다고 나서면 몰라도, 아, 몰라.
고상호 암튼 짜식이 비젼이 없어. 비젼이.
강정옥, 고기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온다.
김갑원 고기가 또 옵니다. 고기.
임공우 김치도 좀 더 내오고, 여기 파도 없네, 파.
출입문이 열린다. 박승조가 들어온다.
박승조 안녕하세요.
김갑원 어, 승조.
고상호 이게 누구야?
강정옥 오랜만이야.
임공우 왔냐?
박승조 (쇼핑백을 건네며) 받으세요, 선생님.
고상호 뭐냐?
박승조 양주예요.
임공우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얼마만이냐? 반갑다. 앉아라.
김갑원 밥 안 먹었지? 이 거 멧돼지야, 멧돼지.
고상호 (양주병을 살피며) 카무스?
박승조 까뮤요.
임공우 무슨 일이야? 시동에는.
박승조 아버지 뵈러 왔다가 잠깐 들렀어요.
김갑원 춘천으로 옮긴다면서?
박승조 네. 거기 신도시 아파트 들어서는데 상가 하나 따냈어요.
김갑원 야, 완전스럽게 성공해버렸네.
고상호 요놈 요놈, 꽁우한테 맨 날 꿀 밤 맞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엉.
춘천으로 옮기면 거, 홍천 세탁소는?
박승조 그 건물, 지난달에 제가 인수 했어요.
김갑원 통째로?
박승조 네. 동생한테 맡기려고요. 짜식이 찜질방 해 본다고 졸라서요.
고상호 찜질방? 야. 하긴, 홍천에도 찜질방 하나는 있어야지.
자, 한 잔 받어. 박사장.
근데 그 신도시, 전망은 좀 있는 거야?
박승조 그럼요. 서울에서까지 경쟁 들어오고 난리도 아니에요.
고상호 야, 세탁소 하면 하루 얼마나 들어 오냐?
너, 홍천 바닥 돈을 다 쓸어 담았다며?
니 선생한테 전수 좀 해 줘라.
청춘어람이다. 청춘어람.
박승조 선생님도 더 늦기 전에 얼른 업종전환 하시는 게...
임공우 됐어, 마. 고기나 먹어.
(강정옥에게) 고기, 승조 것도 좀 싸. 몽창.
박승조 춘천이고 서울이고 라사는 다 넘어졌어요. 남아난 곳이 없어요.
전화벨이 울린다.
임공우, 전화를 받는다.
임공우 여보세요. 여보세요?
반응이 없자 수화기를 놓는다.
박승조 아주 유명한 곳 몇 군데, 연예인 상대하거나 재벌들 상대 하는데 빼놓고 는 없어요, 양복점. 가능성 제로예요. 제로.
전화벨이 울린다.
임공우, 전화를 받는다.
임공우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 씨발!
임공우, 수화기를 던져버린다.
강정옥 왜요? 누군데요?
임공우 전화를 해 놓고 말을 안 해. 써그럴 놈의 새끼가.
고상호 성격하고는, 오랜만에 승조까지 왔구만.
김갑원 술 받아요, 형님.
고상호 박사장, 이 게 멧돼지야, 자네 스승이 직접 사냥해서 잡은 멧돼지.
박승조 진짜요?
김갑원 파방!
박승조 선생님, 그 정도셨어요?
김갑원 몰랐어?
박승조 아니, 알고는 있었는데요, 워낙 선생님 성격이랑 안 맞는 일이라서
그냥 대충 하시는 줄 알았는데.
고상호 박사장, 꽁우 성격 많이 변했어.
이제는 내가 쫄아. 거칠어졌어.
임공우 곰 잡는다.
고상호 하하하
임공우 다음에는 불곰 그놈! 내가 잡고 만다.
고상호 허허허. 인터넷에 나겠네. 뜨겠네, 떠.
임공우 (고상호의 멱살을 잡으며) 왜? 내가 못 잡을 것 같아?
고상호 참나, 취했냐?
박승조 (임공우를 말리며) 선생님, 많이 드셨어요?
임공우 (박승조의 머리를 때리며) 이런 느자구없는 새끼가!
내가 너 이렇게 가르쳤냐?
김갑원 왜 이러셔요, 형님!
박승조 아이 씨...
임공우 뭐? 뭐라 그랬어? 이 돈버라지 같은 새끼야.
내가 재봉사가 되라 그랬지, 재돈사가 되라 그랬냐, 나가. 나가 새끼야.
강정옥 왜 그래요?
출입문이 열린다.
성현기가 들어온다.
고상호 충성!
임공우 오셨...어요...
무슨... 일로?
성현기 양복점에 왜 왔겠습니까?
임공우 네?
성현기 양복 맞추러 왔습니다.
사장님 실력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임공우 네?
하이고 참... 식사는?
성현기 먹었습니다.
자, 뭐부터 해야 하지요?
옷감은 제일모직 최고급으로 하겠습니다.
색상은 흰색으로 하겠습니다.
임공우 일단, 기지부터 고르... 아니아니, 치수부터 재야...
임공우, 고?김?박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한다.
고상호 좀 있다 다시 올게.
김갑원 형님, 잘 하셔요.
임공우 그래, 어서들 가. 고기는 다 싸 둘 테니까.
승조야, 좀 전에 미안하다. 꼭 고기 가지러 와.
강정옥, 탁자 위를 치워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임공우, 줄자와 치수기입용지를 찾느라 허둥댄다.
임공우 오시지요, 국장님.
윗옷은 벗어주시고요.
성현기, 상의를 벗는다.
성현기 바지는 안 벗어도 괜찮죠?
임공우 네. 물론입니다.
(쪽문을 향해) 저기! 여보!
강정옥, 나온다.
임공우 (성현기 눈치를 살피며) 치수 재야 할 것 아냐?
강정옥, 줄자를 들고 성현기의 앞, 뒤, 옆, 밑을 돌며 그의 몸을 재기 시작한다.
임공우, 성현기 옆에 서서 치수를 적는다.
강정옥 가슴, 삼십 구.
임공우 가슴, 삼십 구.
강정옥 허리, 삼십 이.
임공우 허리...
강정옥 허벅지, 이십 이.
임공우 ... 이십 이.
강정옥이 성현기의 팔 길이를 잴 때,
성현기, 임공우 몰래 강정옥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인다.
임공우, 들뜬 표정으로 볼펜을 돌리며 치수를 적는다.
성현기, 바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강정옥에게 건넨다.
놀란 강정옥, 서둘러 편지를 감춘다.
7
새벽. 캄캄한 실내.
임공우, 쪽문을 열고 나온다.
형광등을 켠다.
표정이 밝다.
임공우, 재단대 앞으로 간다.
차곡耽?개어 놓은 옷감을 펴 본다.
강정옥, 쪽문을 열고 나온다.
임공우 자지, 뭐 하러 나와?
강정옥 지금 하시게요?
임공우 응.
강정옥 자고 내일 하세요.
임공우 피곤 할 텐데 얼른 자.
강정옥 아직 날도 많이 남았는데...
임공우 두근거려서 잠이 안 와.
강정옥 옆에 있을까요?
임공우 괜찮아.
너무 오랜만이라, 마음도 들뜨고, 손도 떨리고...
그래도 잘 될 거야. 5년 전처럼 잘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그 때보다 더 잘 해야지.
강정옥 조금만 하다가 들어와요.
임공우 아까 ... 좋았지?
강정옥 ...
임공우 나, 잘 한 거지? 괜찮았지?
강정옥 왜 그렇게 봐요?
임공우 (정옥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이쁘다.
임자는 웃을 때가 젤루 이뻐. 홍시마냥 불그락 피어올라.
(정옥의 손을 잡으며) 따뜻하다.
근데 아까 왜 울었어?
사람이 참...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아무리 오랜만에 하는 거라도 그렇지,
임자가 우니까 나도 짠해지는 게...
우리 한 번 더 할까?
강정옥 저 먼저 자요.
임공우 알았어. 좀만 하다가 들어갈라니까...
강정옥,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임공우 내 꿈꿔!
임공우, 치수기입용지를 보며 옷감 위에 자를 대고 초크 칠을 한다.
옷감을 자르려고 재단용 가위를 쥔다.
손이 떨린다.
가위를 내려놓고 약이 들어있는 서랍을 본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가위를 쥔다.
임공우, 옷감을 자른다.
8
환한 햇살이 실내를 가득 채운다.
임공우, 재단대 앞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강정옥, 옆에 앉아서 바늘에 실을 꿰어준다.
강정옥 잘 되요?
임공우 글쎄. 보실보실 한 게 슥슥 잘 빠지는 느낌은 있는데
착착 내 것으로 붙는 느낌이 안 드네.
기지가 너무 미끈해. 나도 모르게 쑥쑥 나가야 하는데
한 코 한 코 속을 알 수가 없어.
강정옥 점심 뭐 할까요?
임공우 임자 좋은 걸로 해.
강정옥 동치미 국수 할까요?
임공우 안 추워?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다) 아야!
강정옥 괜찮아요?
임공우 (손가락을 보며) 휴지.
강정옥, 화장지를 뜯어 임공우에게 건넨다.
임공우, 화장지로 손가락에 맺힌 피를 닦는다.
강정옥 약 발라야지?
임공우 됐어. 참나, 피가 다 맺히네.
굳은살도 시간이 지나면 풀리나.
강정옥 빨간약 드려요?
임공우 괜찮아.
강정옥, 쪽문을 열고 들어가 소독약을 들고 나온다.
강정옥 발라요. 빨간약.
임공우 (계속 바느질을 하며) 알았어.
강정옥 그냥 두면 큰일 나요.
임공우 오늘 맞지? 언제쯤 오시려나?
강정옥 네?
임공우 국장님.
강정옥 글쎄요.
임공우 계약서를 받아 두는 건데.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사람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어려워서 말이 나와야 말이지, 괜히 속 보이는 것 같아서.
혹시 명함 같은 거 받아둔 거 없지?
강정옥 (달력으로 시선을 돌리며) 닷새 후에 오신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맞는데...
오후에 오시겠죠. 일 끝나고.
출입문이 열린다.
고상호가 군복과 한복을 들고 들어온다.
고상호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강정옥 오셨어요.
고상호 야, 임사장, 인사도 안 하냐?
너, 멧돼지 잡았다고 너무 하는 거 아니냐?
일은 잘 되고?
임공우 왜?
고상호 (옷을 재단대 위에 놓으며) 야, 좀 다려주라.
임공우 치워, 마. 재단대 위에다가... 쯧.
강정옥 (옷을 들어 다림대 위로 옮기며) 급하세요?
고상호 네. 내일 사단장님 따님 결혼식.
임공우 사단장 딸내미 시집가는데 니가 왜 가냐?
불러주든?
고상호 청첩장이 왔으니까 가지.
연대장도 같이 가자고 하고.
임공우 아무튼 난 힘들다. 니 쫄따구한테 시켜라.
고상호 야, 그래도 니가 해 줘야지.
임공우 알았어, (강정옥에게) 임자가 좀 해 줘.
강정옥 내일 아침에 찾으러 오세요.
임공우 민형이 엄마는 뭐하냐? 서방 옷 하나 안 다려주고.
고상호 아, 다리미 고장 났어.
출입문 열린다.
김갑원이 반찬통을 들고 들어온다.
임공우 왔냐? 야, 너 상호 다리미나 고쳐줘라.
김갑원 네?
고상호 됐어. 몇 푼이나 한다고, 까짓것 한 대 사야지.
(반찬통을 보며) 뭐냐?
김갑원 (강정옥에게 건네며) 우주엄마 친정에서 갓김치 보냈더라고요.
강정옥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김갑원 우주엄마가 전번에 멧돼지 잘 먹었다고.
(임공우를 향해)
형님, 거기 그러고 앉아 계시니까 멋스럽네요.
야, 가게 안이 훈훈스럽네요.
두 분 얼굴도 엄청스럽게 명랑스러우시고.
고상호 (김갑원에게) 야, 나는?
김갑원 네?
고상호 마, 갓김치, 우리집은?
김갑원 아휴, 쪼끔 있는 거 가지고 온 거예요.
다리미 고장 났어요?
가지고 오세요.
고상호 됐어, 마. 있다가 부대 들어와서 짤순이나 고쳐.
밥은 먹었냐? 짜장이나 시켜먹자.
김갑원 형님이 쏘실라구요?
임공우 안돼. 냄새 배겨.
마, 부대 가서 짬밥 먹어.
김갑원 우리 가게로 가요.
공우 형님, 바쁘신 것 같은데.
고상호 너, 또 탕수육까지 엉길라 그러지?
김갑원 수고하세요.
고상호 간다.
강정옥 가세요.
김갑원과 고상호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 자식은 공짜 밥 놔두고 꼭 헛돈을 쓰려고 한다니까.
저게 다 마음이 허해서 그래.
보니까 마누라가 밥도 잘 안차려 주는 거 같던데.
강정옥 민형이 엄마야 교회일로 바쁘니까.
임공우 하긴, 여기저기 숫내 흘리고 댕기는 놈을 이뻐 하겠어.
강정옥 국수 삶을 게요.
임공우 오랜만에 임자 풍금소리나 들을까?
물 끓을 동안 한 곡 쳐봐.
강정옥 싫어하잖아요...?
임공우 임자가 맨 날 슬픈 곡만 치니까 그랬지.
괜히 우울해지니까...
괜찮으니까 아무 거나 한 번 쳐봐.
강정옥,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잠시 후 풍금소리가 들려온다.
임공우, 흥얼거리며 바느질을 한다.
출입문이 열린다.
성현기가 들어온다.
임공우 오셨습니까?
성현기 네. 오늘 맞지요?
임공우 네. 딱 맞춰 오셨습니다.
5분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제 막 중가봉(中假縫)을 마치려던 참이었습니다.
좀 앉으시지요.
임공우,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풍금소리, 멈춘다.
임공우, 쪽문을 열고 나와 서둘러 바느질을 한다.
강정옥, 나온다.
강정옥 오셨어요? ... 차 한 잔 드릴까요?
성현기 괜찮습니다. 연주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벽에 걸린 베토벤 초상화를 보며) 베토벤 맞지요?
강정옥 네.
성현기 풍금으로도 베토벤을 칠 수 있습니까?
강정옥 네?
성현기 하하하. 아닙니다. (브룩실즈 초상화를 보며) 저 모델은 브룩실즈로군요.
임공우 맞습니다. 역시 알아보십니다. 대단했었어요.
이쁘고 키 크고 학벌도 좋고.
아이큐가 148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성현기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80년대 세계 최고 미녀.
남편을 잘못 만났죠.
키 작은 대머리 테니스 선수랑은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어요.
지금은 다른 남자를 만나서 잘 산다고 들었어요. 아이도 갖고.
어, 그러고 보니까 사모님하고 닮으신 것 같은데요.
임공우 과찬이십니다.
성현기 아직 멀었습니까?
임공우 네. 곧 됩니다.
임공우, 바느질에 열중한다.
성현기, 곁눈질로 임공우를 살피며 강정옥을 본다.
성현기,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강정옥에게 건넨다.
강정옥, 당황하며 받지 않으려고 한다.
편지가 바닥에 떨어진다.
강정옥, 편지를 재빨리 탁자 밑으로 밀어 넣는다.
임공우, 중가봉 된 양복 상의를 들고 일어난다.
임공우 다 됐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임공우, 성현기의 상의를 벗겨 강정옥에게 건네고
중가봉 상의를 입혀준다.
성현기,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핀다.
임공우 어떠십니까?
성현기 흠...
임공우 문제라도?
성현기 (팔을 펴보며) 조금 퍽퍽한데요.
임공우 불편하십니까?
성현기 네. 조금만 여유를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임공우 네. 잘 알겠습니다.
어떻게... 디자인은 좀 맘에 드십니까?
성현기 조금 촌스러운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복고풍으로 한 벌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성현기, 중가봉 상의를 벗어 임공우에게 건넨다.
강정옥, 들고 있던 상의를 성현기에게 건네려고 한다.
성현기, 입혀 달라는 자세를 취한다.
강정옥, 입혀준다.
임공우 완가봉(完假縫) 때는 실망 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성현기 언제까지 되겠습니까?
임공우 국장님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성현기 빠를수록 좋습니다.
임공우 노력하겠습니다.
성현기 제가 당분간 여기까지 왔다 갈 여유가 없을 것 같은데
다음에는 홍천 정도로 와 주시는 게...
사장님은 바쁘실 테고 혹시 사모님 시간이 괜찮으시면...
임공우 아닙니다. 바쁘지 않습니다. 제가 오토바이가 있으니까요.
춘천까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성현기 음... 그래 주시면 고맙긴 한데...
아,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까 여기 홍대령 만나러 올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공우 아, 연대장님요?
성현기 네.
임공우 전 괜찮습니다. 어디든 가지고 가겠습니다.
성현기 아닙니다. 제 연락처 알고 계시지요?
임공우 아, 그렇지 않아도 명함을 받아 놓는 다는 게. 한 장 주십시오.
성현기 저런, 흠, 저번에 드린 것도 같은데.
(명함을 꺼내 임공우에게 건넨다) 여기.
임공우 연락드리겠습니다.
성현기 다시 뵙겠습니다. 그 때는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례) 그럼.
임공우 (허리를 굽히며) 네.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강정옥, 출입문을 열어 준다.
성현기, 나간다.
임공우, 뒤따라 나간다.
강정옥, 다급하게 탁자 밑의 편지를 주워 쪽문으로 들어간다.
9
임공우, 재단대 앞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강정옥, 다림대 앞에 앉아서 군복을 다리고 있다.
임공우, 바늘구멍에 실을 끼워 넣으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임공우 (뜬금없이) 풍금으로는 힘든 거야?
강정옥 네?
임공우 베토벤.
그렇겠지. 베토벤이 풍금으로 되겠어. 피아노 정도는 있어야지.
강정옥 곡에 따라 틀려요.
풍금으로 가능한 것도 있고, 꼭 피아노가 필요한 것도 있고.
임공우 그럼 들어가서 한 번 쳐봐.
강정옥 이 시간에요?
임공우 뭐 어때?
강정옥 안돼요. 베토벤은 어려워서 잘 치지도 못하고.
임공우 요즘, 임자 얼굴 참 보기 좋아.
강정옥 네?
임공우 잘 웃고, 환해졌어.
근데... 베토벤이 장님이었던 거 맞지?
강정옥 장님이 아니라 나중에 귀머거리 됐다고 들었는데.
임공우 그래? 햐.
음악 하는 양반이 소리를 못 듣고 살았으니 오죽이나 답답했겠어.
(초상화를 보며)
대단해. 위대한 예술가야.
(눈을 감으며)
눈 먼 재봉사가 바늘구멍에 실 집어넣는 거랑 똑 같은 거 아니겠어?
아예 소리를 못 듣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음악을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나도 봉사가 되야 하나 몰라.
혹시 알아, 기똥찬 옷 한 벌 턱 하고 만들어 낼지.
강정옥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임공우 ... 임자는 애 생각 없어?
강정옥 ...
임공우 애기 갖고 싶은 마음 없냐고?
강정옥 왜 없어요.
임공우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
강정옥 ...
임공우 피아노 학원 다시 다녀.
배우고 싶어 했잖아.
배워서 들려줘.
나중에 우리 애기 생기면 가르치기도 하고.
강정옥 ...
임공우 ... 싫어?
강정옥 그래도 괜찮아요?
임공우 몇 푼이나 된다고. 괜찮아.
내 약값이랑 담뱃값만 줄여도 충분해.
다 끊어 볼라니까.
강정옥 ... 고마워요.
임공우 (일어나 기지개를 펴며) 힘들다.
좀 쉬었다 해야지.
임공우, 소파에 가서 눕는다.
강정옥 (임공우에게 다가가며) 여기서 웅크리지 말고 들어가서 눈 좀 붙여요.
임공우 아, 금방 일어날 거야.
강정옥 잠깐이라도 제대로 자요. 깨워 줄 테니까.
임공우 괜찮다니까.
강정옥 감기 걸려요.
강정옥, 임공우를 떠 밀어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강정옥, 피아노 악보집을 들고 나와 소파에 앉는다.
악보집을 펼쳐 책갈피에서 편지를 꺼내 읽는다.
편지를 다시 책갈피에 넣고 악보집을 덮어 품에 안는다.
가게 안을 서성인다.
강정옥, 다림대 서랍을 열어 종이와 볼펜을 꺼낸다.
소파에 앉아서 편지를 쓴다.
10
성현기, 완가봉 된 양복 상의를 입은 채로 거울을 보고 있다.
임공우, 그 옆에 서서 성현기를 보고 있다.
강정옥, 성현기의 상의를 들고 서 있다.
임공우 어떠십니까?
성현기, 대답 없이 몸을 움직이며 거울 속을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임공우 불편하십니까?
성현기 ...
임공우 마음에 안 드십니까?
성현기 너무 마음에 들어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임공우 네?
성현기 뭐든 뭔가 허전한 게 남아야 다시 찾을 생각이 들지요.
임공우 ...
성현기, 완가봉 상의를 벗어 임공우에게 건넨다.
임공우 시간을 주십시오. 다시 하겠습니다.
성현기 하하하.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지난번보다 훨씬 편합니다. 아주 부드러운 느낌이 듭니다.
임공우 감사합니다.
그럼 본봉(本縫)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성현기 끝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마무리가 잘 되면 저는 사장님께 계속해서 일을 드리고 싶습니다.
동료, 부하들에게 적극 추천하겠습니다.
임공우 영광입니다.
성현기 언제 시간 되시면 식사 대접을 하고 싶습니다만.
임공우 괜찮습니다.
성현기 사장님과는 이야기가 재밌게 될 것 같습니다.
사모님과도 잘 통할 것 같고요.
임공우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국장님, 그럼... 계약서를 써도 되겠습니까?
가봉(假縫)도 끝나고 이제 본봉에...
성현기 아, 그런 절차가 있습니까?
임공우 네. 제가 미리 살폈어야 했는데 늦어졌습니다.
성현기 아이고, 저런. 계약금도 미리 드렸어야 했군요.
임공우 아닙니다. 그건 여유 있으실 때 주셔도...
성현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임공우 아닙니다.
성현기 네. 지금 작성하도록 하지요.
이 것 참, 원단 값이라도 미리 드렸어야 했던 건데.
임공우, 재단대 서랍을 열어 계약서와 볼펜을 꺼낸다.
강정옥, 품속에서 편지를 꺼낸다.
들고 있던 성현기의 상의 주머니 속에 편지를 넣어
성현기에게 건넨다.
성현기, 상의를 입는다.
임공우, 계약서와 볼펜을 성현기에게 건넨다.
임공우 자, 읽어보시고 여기 요 밑에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성현기 (흠칫 놀라며) 여기 동그라미 수가...
임공우 네, 여섯 개...
성현기 ...
임공우 .....이백만원...
성현기 아아, 얼핏 이십만원으로 보여서요... 하하.
뭔가 잘 못 된 게 아닌가 하고요. 하하.
임공우 하하하.
성현기 하하. 가격이 무난합니다.
임공우 최고급을 원하셔서 아껴두던 호주산 양모를 썼습니다.
이 게 사실 고급 기지이긴 합니다.
이삼십만원짜리 하고는 비교가 안 되지요.
뭐, 솔직히 최고급은 못됩니다.
찾으신다면야, 서울에서 구해 올 수도 있습니다.
가격은 한 오백 정도...
처음이라 원단 값만 계산했습니다.
성현기 그러면 안 됩니다. 제 값을 받으셔야죠.
임공우 아닙니다.
이 재료가 주인 만날 날이 올지 기대를 못했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성현기,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낸다.
편지가 딸려 나와 땅에 떨어진다.
강정옥, 당황하며 편지를 줍는다.
강정옥 (성현기에게 편지를 건네며) 여기요.
성현기 (멈칫하다가) 감사합니다.
성현기, 편지를 주머니 속으로 넣는다.
성현기 (지갑을 펼쳐 수표 세장을 꺼내며)
어떡하죠? 제가 오늘은 일단 이 정도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임공우 괜찮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지금은 그냥 가시고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성현기 삼십만원입니다.
임공우 고맙습니다.
성현기 나머지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임공우 네.
성현기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사장님.
임공우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아, 연대장님은 잘 만나셨습니까?
성현기 네? 아, 네.
그럼 이만. 나오실 것 없습니다.
임공우 살펴 가십시오.
강정옥 조심히 가세요.
성현기,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 소파에 앉는다.
임공우 다행이지?
강정옥 ... 네.
임공우 잘 됐어.
(전에 바늘에 찔린 손가락을 보며)
아까징끼 어디다 뒀지?
강정옥 (임공우의 손가락을 보며)
아파요? 어디 봐요. 어머, 부었네.
빨간약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은데.
같이 약국 가 봐요.
임공우 됐어. 아까징끼 한 방울이면 돼. 어지간한 병균은.
강정옥, 쪽문을 열고 들어간다.
고상호,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고상호 뭐하냐?
임공우 어, 왔어.
고상호 고되 보인다. 어디 아프냐?
임공우 오늘 부대 뭐 있었어? 연대장.
고상호 연대장? 휴가 받아서 서울 집에 갔는데.
임공우 언제?
고상호 엊그저께.
강정옥, 소독약을 들고 나온다.
강정옥 오셨어요.
고상호 아이고, 갈수록 얼굴이 확 펴 가십니다.
강정옥 뭘요...
강정옥, 임공우에게 소독약을 건넨다.
임공우, 손가락에 소독약을 바른다.
고상호 어디 베였냐? 봐봐.
음마, 고름 짜야겠는데.
너, 이거 발라 가지고는 택도 없어.
임공우 호들갑 떨지 마.
고상호 마, 이렇게 계속 놔두면 파상풍 걸린다, 너.
강정옥 저, 약국 갔다 와요.
임공우 괜찮다니까.
강정옥,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 너, 그 때 그 거 뭐였냐?
고상호 뭐?
임공우 그 때 그 거. 다시 찾으러 왔던 거.
고상호 뭐?
임공우 아, 일급비밀이라 그랬던 거.
고상호 일급비밀? 뭐지?
아, 음어표!
임공우 음어표?
고상호 그 때, 잃어버린 줄 알고 똥줄 탔다니까.
임공우 왜, 중요한 거야?
고상호 암호니까 중요하지.
그 거 잃어버리면 전군이 비상이야. 비상.
기냥, 옷 벗어야 된다니까.
임공우 잃어버려도 모른 척 하면 되겠네.
고상호 엥?
임공우 아니다.
난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줄 알았다.
연애편지라도 되는 줄 알았지.
고상호 히히히. 깔따구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지미.
요새는 사냥 안하냐?
마, 갑원이 불러서 소주나 한 잔 하자.
임공우, 일어나서 산탄총을 잡는다.
임공우 사냥, 그 거 좋지.
임공우, 총을 들어 사격자세를 취한다.
조준구에 눈을 붙이고 가게 안을 쭉 훑는다.
총구가 성현기의 완가봉 양복 상의에서 잠시 멈춘다.
총구, 다시 움직여 출입문을 향할 때
강정옥, 연고를 들고 들어온다.
강정옥, 놀라서 연고를 떨어뜨린다.
11
임공우, 재단대 앞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다.
강정옥, 쪽문을 열고 나온다.
외출복을 입고 화장을 했다.
피아노 악보집을 넣은 가방을 들었다.
임공우 따뜻하게 입고가.
강정옥 금방 올 건데요. 뭐.
임공우 장갑 끼고.
강정옥 알았어요.
임공우 조심하고.
강정옥 네. 손가락은 괜찮아요?
임공우 괜찮아.
강정옥 완성 날이 내일까진데...
얼른 갔다 와서 도와드릴게요.
임공우 뭘, 시침질하고 단추 달면 끝인데.
강정옥 저녁상 차려 놨으니까 드세요.
미역국 끓여 놨으니까 데워 드시고.
임공우 좋아?
강정옥 ...
임공우 잘 하고 와.
강정옥 갔다 올게요.
강정옥,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 창밖으로 강정옥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바느질을 시작한다.
잠시 후, 김갑원,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김갑원 형수님은 학원 가시나 봐요?
임貶? 응.
김갑원 피아노학원이야 시동에도 많은데, 먼 길 꼬박꼬박 잘 다니시네요.
임공우 코흘리개들 가르치는 곳이랑 같냐, 임마.
니 형수는 달라.
김갑원 오늘 바빠요, 형님?
있다가 사냥 안 가실래요?
임공우 왜? 몸이 근질근질하냐? 총도 못 쏘는 놈이.
김갑원 네. 오늘 눈 무지스럽게 온다고 그러던데.
임공우 (창밖을 보며) 눈 올 하늘이 아닌데.
김갑원 왜요? 몸이 꾸물꾸물스러운 게 딱 올 것 같은데요.
임공우 젊은 놈이 벌써부터.
김갑원 뉴스 못 보셨어요?
분명히 온다고 그랬는데.
눈 오면 잡기 쉬운 애들 많다면서요?
사슴, 노루, 토끼...
임공우 됐어, 임마. 바뻐.
내일이 기일이야.
김갑원 와, 드디어 내일입니까?
고상호,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고상호 갑원아, 짤순이 또 안 된다.
김갑원 아이 참.
그 거 한 번에 조금씩만 넣고 돌려야 되는데.
고상호 어떻게 다시 좀 해봐.
김갑원 또 왕창스럽게 돌려 버렸구만.
고상호 애들, 겨울철이라 빨래 때문에 난리다.
김갑원 죽은 엔진 겨우 살린 건데.
거, 이제 안 되는데.
고상호 바꿔달면 되잖아?
김갑원 엔진 사려면 홍천 나가야 되요.
고상호 그래?
오늘은 틀렸네. 눈 겁나게 온다더만.
또 시동 바닥 버스 죄다 끊기겠구만.
부대 애들 낼 아침에 눈 치우느라고 죽을라 그러겠다.
임공우 많이 온대?
고상호 몰랐냐? 대설주의보 떨어졌어.
실내가 어둑해진다.
고상호 (창밖을 보며) 음마, 몰려오는 갑다.
가야 되겠다. 하필 이런 날 일직이야.
잠자긴 다 글렀구나. 나, 간다.
고상호,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김갑원 형수님은 괜찮스러울까요?
임공우 뭐가?
김갑원 아니, 길 막히면.
해 마다 난리스럽잖아요?
조금만 와도 툭하면 버스 끊기고.
임공우 알아서 오겠지. 애도 아닌데.
김갑원 형수님, 핸드폰도 없잖아요?
임공우 ...
김갑원 사냥... 안 가실 거지요?
저도 가 볼게요.
김갑원,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 문가에 기대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둠이 몰려온다.
12
임공우, 창밖을 보고 서있다.
출입문을 연다.
눈발이 날려 들어온다.
폭설이다.
임공우, 시계를 본다.
가게 안을 서성이다가 다림대 앞에 앉는다.
바느질을 한다.
손가락이 아프다. 바늘을 놓고 창밖을 본다.
쉼 없이 쏟아지는 눈.
김갑원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김갑원 (눈을 털어내며) 아이고, 벼락이 쳐요. 눈 벼락.
형수님 아직 안 오셨지요? 길 끊어 졌다는데.
임공우 ...
김갑원 전화는요?
임공우 ... 응. 왔었어.
김갑원 괜찮스럽대요?
임공우 그럼 임마, 거 홍천에 니 형수 동창들 많아.
김갑원 잘 됐네요. 철물점 양씨 아저씨가 그러는데 난리도 아니래요.
버스 중간에 서 가지고 꼼짝도 못하고, 자가용 미끄러져서 쳐 박고...
임공우 곧 그치겠지 뭐.
김갑원 내일 아침까지는 계속 온대요.
그래도 형수님은 다행스럽네요. 묵을 곳이라도 있어서.
(창밖을 보며) 아이구, 점점 더 와요.
한 번 쓸어줘야지 안되겠어요.
갈게요. 형님.
임공우 갑원아, 미안한데, 하는 김에 우리 가게 앞도 좀 쓸어주라.
내가 오늘 좀 바쁘다.
김갑원 알았어요.
혼자서 적적스러우시겠어요. 눈도 오는데.
그래도 내일 이면 완성인데. 수고하세요. 형님.
김갑원,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임공우, 가게 안을 서성이며 시계를 본다.
소파에 앉아 전화기를 보다가 전화를 건다.
임공우 홍천경찰서 번호요.
네. 네? (전화가 혼선이 된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임공우,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다시 걸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임공우 여보세요.
(버럭) 아, 왜 이제 전화를 해!
어떻게 된 거야?
...
괜찮아?
응. 응.
그래서?
응. 응.
미희? 미희가 누구야?
응. 알았어. 그래.
괜찮겠어?
전화를 빨리 좀 하지.
됐어. 응. 그래.
자기 전에 전화해.
알았어. 괜찮아. 응.
조심하고.
그래.
임공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재단대로 가서 바느질을 한다.
갑자기 형광등이 꺼진다.
정전.
잠시 후, 형광등이 다시 켜진다.
임공우, 계속 바느질을 하다가
아픈 손가락을 주무르며 창가로 간다.
창밖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서 가게 안을 훑는다.
임공우, 재단대로 돌아와 다시 바느질을 시작한다.
시계를 본다. 창밖을 본다.
충동적으로 서랍을 열어 약을 꺼낸다.
먹지 않으려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입에 넣는다.
임공우, 다시 바느질을 시작한다.
시계를 본다. 창밖을 본다. 전화기를 본다.
일어나 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방 안에서 풍금소리가 들려온다.
건반을 누르는 몇 번의 소리. 따다당, 따다당...
형광등이 꺼진다.
정전.
건반을 두드리는 몇 번의 소리. 땅, 땅, 따앙...
풍금소리 멈추고 잠시 후,
임공우, 촛불을 들고 나온다.
촛불을 재봉틀 옆에 놓는다.
재단대 위에 놓여있던 성현기의 양복을 재봉틀로 옮긴다.
임공우, 재봉틀 앞에 앉아 발판을 밟기 시작한다.
두루룩, 두루룩... 바늘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임공우, 발판을 밟으며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재봉틀을 돌린다.
마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두룩, 두루룩, 두루루루룩...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계속된다.
어디선가 풍금소리가 들려온다.
촛불에 어른거리는 베토벤의 얼굴, 임공우의 뒷모습.
13
햇살이 눈부시다.
다림대 앞 옷걸이에 잘 다려진 성현기의 흰색 양복이 걸려있다.
탁자 위에 촛농만 남은 초가 놓여있다.
임공우, 소파에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다.
강정옥,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성현기의 양복을 본다.
호흡을 고르고 임공우를 흔든다.
임공우, 일어난다.
임공우 어... 왔어?
(시계를 본다) 어히고... 정신없이 잤네.
강정옥 밤샜어요?
임공우 응.
강정옥 고생하셨어요. (성현기의 양복을 보며) 멋있어요.
임공우 내가 뭐 한 게 있나. 입을 사람이 멋있으니까 옷도 멋있지.
강정옥 걱정 많이 했지요?
임공우 전화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다시 한다고 했잖아?
강정옥 어제 전기고 전화고 뭐고 다 끊어 졌어요.
참, 정전 됐는데... 어떻게... (초를 본다.) ...
임공우 걱정도 안 했나 보네.
강정옥 아녜요.
임공우 그 친구는 핸드폰도 없어? 갑원이 통해서라도 한 통 하지.
강정옥 그 시간에 미안해서...
임공우 피곤해 보여. 별 일 없었고? 잠은 잘 잤어?
강정옥 네.
김갑원,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김갑원 와, 겁스럽게 퍼 부울 땐 언제고 하늘이 화창스럽네요.
형수님, 욕 보셨겠어요.
강정옥 아, 네...
고상호, 눈삽을 들고 들어온다.
고상호 안녕들 허십니까?
강여사님, 들어오셨네요.
어제 못 넘어 오셨다면서요?
꽁우 홀 애비 만들고 신나셨겠습니다. 하하.
임공우 가서 눈이나 치워 임마.
김갑원 형님 작품 구경 왔어요.
고상호 (성현기의 양복을 발견하고) 야, 이백짜리가 저거냐?
(양복 앞으로 다가가며) 와, 죽이네.
임공우 건들지 마. 때 타니까.
김갑원 멋스럽네요. 저 걸 형님 손으로 만드신 거예요?
(임공우의 손을 잡는다.)
임공우 (손가락 통증을 느끼며) 아!
김갑원 (손을 놓으며) 어이쿠. 괜찮으세요...?
임공우 괜찮아, 괜찮아.
강정옥 연고 발랐어요? 계속 발라요.
임공우 응. 바르고 있어. 괜찮아.
고상호 세상에 누가 흰 양복을 입고 다니는 가 했더니만 가후가 그대로 나온다. 히야, 와, 국장 그 양반이랑 잘 어울리겠어. 응?
임공우 왜 입고 싶냐?
고상호 왜 한 벌 공짜로 해 줄라고?
김갑원 형님, 혹시 천 남은 거 없어요?
우리 우주 양복 해 입혀 놓으면 엄청스럽게 귀엽스러울 것 같은데.
임공우 니들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한 벌 씩 해 입어 자식들아.
내가 보너스로 저 사람이랑 데이트 한 번씩 시켜 줄라니까.
고상호 진짜? 내가 그럼 한 벌 해 입지. 해 입는다. 내가.
강정옥 장난치지 마세요.
성현기,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고상호 충성!
성현기 밤새 안녕 하셨습니까?
임공우 오셨습니까.
성현기 별 탈들 없으셨습니까?
어제 많이 답답하셨지요?
공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을 대표해서 사과드립니다.
고상호 아, 아닙니다.
강정옥 일찍 오셨네요.
성현기 네. 오후에는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서둘렀습니다.
다행히 도로 제설 작업이 잘 이뤄져서요.
고상호 아, 대단합니다. 그 모두가 도시국장님의 힘 아니겠습니까?
성현기 하하. 아닙니다. (고상호의 눈삽을 보며)
일선에서 이렇게 수고해주시는 덕분입니다.
자, 그럼 옷을...
임공우 (양복을 들어 보이며) 약속 드렸던 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 이리로 오시지요. (쪽문을 연다.)
임공우와 성현기, 방으로 들어간다.
고상호 어쩜 저렇게 신사냐? 안 그래요? 강여사님.
강정옥 네.
김갑원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위스러움 그 자체스러움이네요.
고상호 (김갑원의 말투를 비꼬며) 아이고, 그러셨스러우세요?
언제 저양반이랑 술 한 잔 해야 하는데.
강여사님, 밥 한 끼 하자고 입질 좀 넣어요.
내가 팔봉가든 가서 소갈비 쏠 테니까.
김갑원 거기 비싸요. 갈비 한 대에 몇 만원 씩 한다고 그러던데.
고상호 너랑 나랑 라벨이 갔냐?
마, 너 나 군복 입고 다니니까 탕수육 밖에로 안 보이지?
이참에 나도 한 벌 해 입어버려.
(진열장 옷감을 살피며) 객관적으로 나는 흰색은 무리고...
여기 체크, 이 거 괜찮네.
김갑원 거기 밤색은 내가 찜한 거래요.
고상호 꼭 골라도... 치, 하긴 잘 어울린다.
야, 우리 한 벌 씩 해 입을까?
강여사님, 둘이 같이 맞추면 세일 안 되나?
강정옥 (쪽문 앞을 서성이다가) 네?
쪽문이 열린다.
양복을 입은 성현기, 뒤따라 임공우가 나온다.
고상호 (박수를 치며) 원더풀! 굿입니다. 굿!
김갑원 멋있어요.
성현기 별 말씀을요.
성현기, 전신 거울 앞에 선다.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성현기 (강정옥에게) 사모님이 보시기엔 어떠십니까?
강정옥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흰색이랑.
■ 희곡 부문 당선 김은성씨 인터뷰
중2때부터 시를 써서 신춘문예를 기웃거렸다는 그가, 고2때는 향가 ‘제망매가’에 필(feel) 받아 드라마 대본을 썼고 희곡으로도 각색해 교지에 실었다는 그가, 도대체 납득이 안 되는 전공을 택해 남산 자락의 대학으로 진학했을 때, 그를 잘 아는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친 X!”
“하지만 드라마 ‘서울의 달’의 김운경씨처럼 멋진 대본을 쓰겠다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곧장 방송동아리에 든다. “방송동아리 위층이 극회 공연장이에요. 어느 날 친구를 따라 갔던 그 소극장의 냄새와 어둠, 배우들의 발자국 소리가 그렇게 편안한 겁니다. 정말 새롭고 생기 넘치는 세계였어요.”
그리고, 2학년 가을 축제. “8㎞ 마라톤에 참가했는데 극립극장 앞에 이르자 맥이 쫙 풀리는 겁니다. ‘기권하자’ 싶더군요. 극장 담장을 넘어 캠퍼스로 돌아가려는데, 예술종합학교 연극원(현 별오름극장) 앞에 신입생 모집요강이 쌓여있어요. 그 길로 자퇴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죠.” 그를 잘 모르던 학교 친구들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미친 X!”
그는 이듬해 예종으로 진학한다. 한 학기를 마치고 입대, 3년을 강원 홍천군 시동에서 보냈다. 당선작은 그 마을에서 겪고 본 이야기를 소재로 쓴 작품이라고 했다. 외진 군사도시의 양복점 주인의 이야기. “행복하려면 급변하는 세상에 보조를 잘 맞춰야 하잖아요. 발맞춤에 실패해 불행한 존재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한 차례 유급 당한 탓에 내년 1학기를 마쳐야 졸업이다. 시도 좋고, 드라마도 좋고, 전공인 연극 연출도 좋다는 그가 또 어디로 튈지.
■ 당선소감
올 겨울도 무척 춥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존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이 추위를 견뎌야 할까요? 따뜻한 날 올까요?
춥다고
혼자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그런 놈은 되지 않겠습니다.
작가는 그래야 한다고
그 것이 쓰는 자의 싸가지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헤파이스토스의 슬픔처럼 예술가는 반성이 아닌 성찰을 내미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신 황지우 선생님, 도망갈 때 꿀밤 때려 잡아주신 김석만 선생님, 따끔하게 안아주신 이상우 선생님, 희곡 쓸 용기 만들어 주신 김태웅 선생님, 연극하는 마음 가르쳐주신 장우재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함께 갈 박상철, 노동혁, 남동훈, 조정일, 전인철, 서명용, 김용훈, 이재욱, 정신규, 안호일, 김이태, 김경민, 이창근, 원지영, 정윤정, 쵸코...
술 취해 자전거 끌고 집에 들어가던 길, 그 막막한 페달에 희망 주셨던 테네시 윌리엄스, 백석, 체홉, 김현, 김운경, 최승자, 윤대녕, 이와이 순지, 햄릿 님... 고맙습니다.
늘 속아주셨던 부모님, 김수미, 김수영, 김동국, 현성일, 김태하, 김서하, 현정민, 현정요... 사랑합니다.
윤영선 선생님!
함께 걷던 컴컴한 흰 눈 길, 잊지 않겠습니다!
멧돼지처럼
계속 가겠습니다.
▦ 김은성(金垠成) 1977년 4월 전남 보성군 출생. 서울 중화고 졸업. 동국대 북한학과 중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4학년 재학중
■ 심사평
예년에 비해 응모작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았다. 심사 내내 작품 읽는 재미에 빠져 있었고, 단 한 작품만을 선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 중 잔잔하면서도 디테일하고 그러면서 모든 인물이 살아 움직이고, 대사 하나하나가 인위적이지 않고 편안하면서도 상징성을 담고 있는 리얼리즘의 극치를 이룬 ‘시동라사’가 모든 면에 있어서 당선작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최종 심사는 의외로 쉽게 끝났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적어도 작가가 마흔은 넘은, 작가지망생으로 한 십 년은 넘게 습작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혹시 활동하던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이후 우리는 두 번 놀랐다.)
하긴 작가가 작품을 쓰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인생의 경험이 작품에 배어 나온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면 그의 다양한 삶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연출자로써 작품을 올려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으니 언젠가 꼭 무대에서 잘 훈련된 연기자와 만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비추어 본다.
하지만 늘어지는 부분이 노출되어 쓸데없이 긴 장면이 많이 있었고, 극적 동기들이 더 많이 부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계속 좋은 사실주의 작품을 써서 우리의 연극적 부흥에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미도 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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