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제비처럼 비상을 꿈꾼 한 여자가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깡촌’에서 자라난 신분의 한계도, 매로써 향학열을 막던 아버지도 그에게는 넘지 못할 장벽이 아니었다.
일본 땅에서 거친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택시 운전도 마다 않고 조종사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던 맹렬 신여성의 드라마틱한 삶은 후대가 기억할 만한 질주 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 고위관료의 지원아래 ‘일만(日滿) 친선 기념비행’에 나섰다가 생을 마감했다면 그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영화 ‘청연’은 친일논란의 대상이 될만한 여비행사 박경원의 삶을 다루면서도 숙명처럼 우리를 지배해 온 민족적 시각과 역사 의식을 들이대지는 않는다. 일제시대는 말 그대로 시대적 배경일 뿐, 카메라는 온갖 장애에 굴하지 않았던 한 여성의 굴곡진 삶을 통해 꿈의 의미를 되묻고 운명의 가혹함을 되새김질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역사의 잣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청연’은 박경원의 삶을 뼈대로 하면서도 허구의 살을 많이 보탰다. 경원의 주변을 맴돌며 보살펴 주는 조선 제일의 갑부 아들인 한지혁(김주혁)이 허구의 중심 축을 이룬다.
전반부는 꿈을 먹으며 살아가는 경원의 삶에 무게 중심을 둔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조선인이라는 차별과 여성이라는 편견을 이겨 냈는지의 과정은 상세히 드러나지 않는다. 돈이 없어 1년 과정인 비행훈련 과정을 4년 만에 마쳐야 했다는 등 주변 사람들의 대사를 통해 신산한 삶의 편린이 나타날 뿐이다. 일제라는 말로 현현하는 착취와 억압의 시대적 공기도 맡기 힘들다.
한지혁과의 달콤한 로랜스도 경원의 희망에 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소품에 불과하다. 그저 세상 끝까지 가고 싶은 꿈을 향해 날아오르는 경원의 당차고 발랄한 모습 만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일면 단조로워 보이는 이런 전개는 박경원의 삶이 흔하디 흔한 영웅담으로 변질 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후반부는 급속한 속도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조선적색단의 요인 암살사건에 경원과 지혁이 연루되고, 사랑을 위해 지혁이 목숨을 저버리면서 상승 곡선을 그리던 경원의 삶은 순식간에 곤두박질 친다. 시대의 불우함 때문에 죽음으로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두 연인의 사연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충분히 자극할 만하다.
윤종찬 감독은 영화 전반 내내 민족주의라는 강박관념을 벗어나 개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한다. 운명에 짓이겨진 밑바닥 인생을 잔인하리만치 사실적으로 그려낸 데뷔작 ‘소름’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95억원이라는 물량을 쏟아 부은 ‘청연’은 한국영화에서 익히 보기 힘들었던 유려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협곡을 드나들며 펼쳐내는 비행 장면은 장관이다. 특히 비행대회에 출전한 경원이 고도상승 경기에서 구름을 뚫고 솟구치는 장면과 경원을 죽음으로 내몬 마지막 비행 장면은 시대를 벗어나고자 했으나 시대에 짓눌릴 수 밖에 없었던 개인의 비극이라는 주제 의식이 정확하게 맞닿는다는 점에서 올해 한국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명장면이다. 29일 개봉. 12세.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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