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개 숙인'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27일 시위농민 2명의 사망에 대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것은 이번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 동안 청와대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위자가 잇따라 숨진 것은 군사정권에서도 없던 일"이라고 언급해온 점이 노 대통령의 인식을 잘 말해주고 있다. 시위농민 사망이 참여정부의 인권 정책과 이미지를 크게 훼손했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회견에서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 드린다"고 했다. 사과의 표현으로는 최상급이라 할 수 있다. 측근들의 비리 의혹이 아닌 정부 잘못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한 것이 처음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그만큼 이번 사안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허준영 경찰청장이 이날 오전 사과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처럼 청와대는 최대한의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당연히 경찰 총수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경찰청장을 쉽게 해임할 수 없다는 대목에서 고민하는 눈치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청와대 참모진 사이에서는 허 청장 자진사퇴 방안이 차선책으로 거론돼 왔다. 여기에는 허 청장에 대한 청와대의 달라진 분위기도 작용했다.
최근 허 청장이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를 놓고 지나치게 검찰과 대립하는 언행을 보이자 청와대가 부담스럽게 느낀 측면이 있다. "허 청장이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에서 국가 전체보다는 경찰쪽만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언급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사퇴하지 않겠다는 허 청장의 입장이 확인되면서 청와대의 기류는 바뀌고 있다. 노 대통령이 허 청장 거취에 대해 "본인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 당초 자진사퇴를 유도하는 발언으로 이해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청와대는 유임 불가피쪽으로 설명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후에도 허 청장이 거듭 사퇴불가 입장을 밝히자 "스스로 물러나라는 뜻보다는 말 그대로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다른 관계자도 "경찰청장 문책론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은 엄정 중립"이라며 "청장이 사표를 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농민단체들이 여전히 허 청장 퇴진을 촉구하고 있고, 정치권과 여론의 시선도 곱지 않아 청와대가 드러내놓고 허 청장을 엄호할 수도 없는 처지다.
■ 버티는 경찰청장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사퇴는 거부했다. 농민단체와 인터넷 등에서 사퇴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허준영 경찰청장이 27일 '사퇴의사가 전혀 없음'을 거듭 강조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청와대의 기류는 허 청장의 자진 사퇴쪽으로 흐르고 있지만 허 청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사퇴불가를 밝힌 데 이어 오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직후에도 " 임기제 청장으로서 맡은 일을 다하는 게 국가공무원으로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이고 국민에 대한 충성"이라고 말했다.
허 청장의 자신감은 우선 그가 여러 번 언급한 '임기제 청장'이라는 표현에 들어 있다. 국민의 정부에서 도입된 경찰청장 2년 임기제의 두 번째 당사자로서 법으로 보장된 임기를 사수하겠다는 결심이다.
전날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어정쩡한 태도도 한몫 했다. 인권위는 서울청장 등 경찰간부 징계를 권고하면서 유독 허 청장의 사퇴에 대해선 "정치적 사안이라 논의할 대상이 아니다"고 피해갔다.
허 청장은 취임 이후 정ㆍ관계의 폭 넓은 인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검ㆍ경 수사권 조정에서 검찰에게 굴하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줘 일선 경찰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경찰 내부도 허 청장의 유임을 바라는 분위기다. 여론에 떠밀린 치안총수의 사퇴는 평화적인 시위문화정착에 도움이 안될 뿐더러 오히려 폭력시위 때마다 모든 책임을 경찰에 떠넘기는 악순환을 부른다는 위기의식도 깔려있다.
한 간부는 "근본적인 잘못은 농민의 요구를 묵살한 정부에 있는데 왜 경찰만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찰이 야심차게 추진 중인 수사권 조정과 근속승진 확대 등 현안이 모두 내년 2월 임시국회로 넘어간 것도 허 청장의 유임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허 청장이 경찰 창설이래 가장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시작하고 추진하고 있는 만큼 그 마무리도 짓는 게 도리"라고 말했다.
허 청장 개인적으로도 여론에 떠밀려 물러나는 모양새가 두고두고 경력에 오점을 남긴다는 점에서 선뜻 사퇴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허 청장 본인은 부인하지만 정치권에서 내년 지방자치단체선거를 앞두고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농민을 죽인 치안총수"라는 낙인을 안고 경찰을 떠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기묵 서울경찰청장이 허 청장을 대신해 총대를 매고 사의를 표명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허 청장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책임을 면하기 위해 부하를 희생시켜왔다는 비난도 들린다. 어찌 됐든 허 청장이 늘 자랑했던 '인권경찰'의 이미지는 이미 빛이 바랬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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