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역사 만큼이나 유서 깊은 화폐 위조는 개인 아닌 국가가 전략적으로 이용한 사례가 많다. 특히 전쟁 때 위조한 적국 화폐를 대량으로 살포, 화폐가치를 추락시키고 경제를 교란해 전쟁 수행능력 약화를 꾀한 기록이 흔하다. 일찍이 영국은 미국 독립전쟁 때 위조 달러를 식민지에 퍼부었다.
남북전쟁 때는 북부 합중국측이 남부연합 화폐를 위조해 뿌리는 전략을 답습했다. 기술이 앞선 북부에서 만든 위조달러는 진짜보다 한결 질이 좋았다니, 교란 효과는 오히려 없었을 듯하다.
■ 전시가 아닌 때 국가 차원에서 외국 화폐를 위조, 국제문제가 된 경우도 있다. 1926년 헝가리에서 만든 프랑스 위폐 1,000만 프랑을 네델란드에서 유통시키려던 조직이 적발돼 유럽이 시끄러웠다.
국제연맹이 3년이나 진상을 조사, 1차 대전 패전으로 영토를 빼앗긴 헝가리가 전후 처리를 주도한 프랑스에 몰래 보복하고 위폐 수입으로 군국주의 정책을 추진하려던 공작을 밝혀냈다. 같은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인쇄기를 지원한 국제적 음모가 드러나 충격을 던졌다.
■ 사상 최대규모 화폐 위조는 2차 대전 때 나치 정권이 기록했다. 독일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유대인 전문가를 모아놓고 영국 파운드화 위폐 수백만 장을 몰래 찍어냈다. 이 위폐는 지금까지도 가장 정교한 수준이고, 액수도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1억3,000만 파운드에 이른다.
나치는 위폐를 영국 상공에서 뿌릴 계획이었으나 일부를 이탈리아에서 돈 세탁, 전략물자 수입과 첩보공작에 쓰는데 그쳤다. 나머지는 종전 직전 오스트리아 에벤제 호수에 수장, 1959년 발굴됐다. 위조보다 살포가 훨씬 어려운 사실을 일러준다.
■미국이 탈북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새삼 제기한 북한의 슈퍼달러(Superdollar) 위조의혹이 역사적 사례와 이야기 줄거리나 구성요소가 흡사한 것은 흥미롭다.
이를테면 미국 경제교란과 외화벌이를 함께 노렸고, 정치범을 동원해 위폐를 만든다는 주장이다. 북한이 미국 경제 교란을 노렸다는 가설은 우습지만, 6자 회담과 관련해 미국 관변과 언론이 이런 주장을 들고 나오는 배경을 잘 살펴야 한다.
슈퍼 달러를 만든다고 미국이 의심한 나라는 러시아 중국 이란 이라크 시리아 북한 등, 미국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한국 언론부터 이걸 살피는 직업적 상식을 가져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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