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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길 위의 이야기] 할아버지와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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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길 위의 이야기] 할아버지와 바나나

입력
2005.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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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시장에 갔다가 열매가 열다섯 개쯤 달린 바나나 한 다발이 2,000원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싸도 너무 싸 저절로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마당 안팎에 참으로 많은 과일나무를 심으신 분이신데, 정작 당신은 앵두나 자두, 포도같이 조금이라도 새콤하거나 신맛이 나는 과일을 드시지 못했다.

그런 할아버지께 그때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형들이 집에 올 때마다 바나나를 사다 드렸다. 바나나가 워낙 귀하고 비싸던 때라 여러 개를 사지 못하고 한 개 두 개, 이렇게 사다 드렸다. 할아버지도 그것을 참 좋아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바나나 값을 물어보고는 깜짝 놀라시며 “비싸기만 하지 맛도 없다”시며 다음부터는 사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옆에서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 드렸다. “아이들이 사오는 물건 좋다고만 하시지, 값을 따져 말하지 마세요. 값을 따져 말하면 얘들이 또 야단들을까봐 다음부터는 좋은 걸 사오지 않아요.”

그러던 아버지도 요즘 우리가 사 가지고 가는 물건의 값을 자주 묻고, 비싼 것은 사오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 옆에서 큰형이 예전에 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한다. 어느 결에 아버지도 할아버지만큼 연세가 드셨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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