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사자성어 ‘상화하택(上火下澤)’은 미술계에도 적용된다.
고 이중섭 박수근 화백 작품에 대한 위작시비로 연초부터 사분오열된 미술계는 이후에도 올해 미술시장 지원을 위해 도입된 미술은행제도를 둘러싼 대립, 청계천 상징조형물 선정관련 잡음으로 얼룩졌다.
연이은 논란과 시장의 침체 속에서도 천안 아라리오미술관이 중국시장에 진출하고 젊은작가 지원프로그램이 잇따라 마련된 것은 그나마 우리 화단의 미래를 위한 의미 있는 행보로 평가된다.
법정으로 비화한 위작 논란
고 이중섭 박수근 화백의 그림에 대한 위작논란은 일부 유명작가 작품에만 수요가 집중되는 국내 미술품 유통시장의 파행성과 천박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술품에 대한 판단마저 사법당국에 맡기는 사상 초유의 사태는 3월 초 이중섭 화백의 차남 태성씨가 부친의 50주기 기념사업을 위해 서울옥션에 위탁, 낙찰된 작품 4점에 대해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씨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있던 김용수 한국고서연구회 명예회장이 이중섭 박수근 그림 수백 점을 갖고있다고 공개하면서 논란은 확산됐고, 결국 이씨와 김씨가 감정협회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법정다툼으로 번졌다.
반년 이상을 끈 검찰 수사는 10월 검찰이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에 감정의뢰한 결과, 감정대상 58점이 모두 위작이라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으나 이씨와 김씨측이 승복하지 않아 여전히 불씨가 살아있는 상태다.
특히 수사과정에서 화랑과 유족, 평론가, 옥션사 등이 서로 이해관계에 따라 반목과 비난으로 일관, 국내 미술시장에 쉽게 치유되지 않을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양대 옥션 체제 시동
위작파문은 국내 미술품경매시장이 양대 옥션 체제로 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위작시비의 진원지였던 서울옥션의 대항마로 11월 K옥션이 출범했다.
그러나 국내 메이저화랑인 가나아트를 등에 업은 서울옥션과 마찬가지로 K옥션은 갤러리현대와 학고재가 대주주로 참가, 스타작가 편식현상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달 9일 K옥션에서 박수근의 ‘나무와 사람들’이 7억1,000만원으로 국내 최고경매가 기록을 세우더니 이 달 14일 서울옥션에서는 같은 작가의 ‘시장의 여인’이 9억원에 낙찰되면서 불과 한달 만에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일부에서는 “거대 상업화랑의 자본을 업은 양대 옥션이 가격부풀리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미술은행제 실시
정부예산으로 미술품을 구입해 정부기관과 지자체, 기업에 대여하는 미술은행제도가 문화관광부 주관으로 3월부터 시작됐다.
25억원의 예산이 집행됐지만 창작지원, 미술시장 활성화, 미술대중화라는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구입대상작품에 대한 뚜렷한 기준 없이 장르별, 출신지역과 학교별 안배를 고려한 선심성 나눠먹기로 흘렀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지속적 미술품구입 창구가 마련됐다는 점은 일단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예술가는 일용직노무자?
2003년 교통사고로 숨진 조각가 구본주 유족과 삼성화재 사이에 벌어진 2년간의 법정소송은 예술가의 법적지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구씨에 대해 예술전문가 5~9년 경력인정과 정년 65세를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판결에 삼성화재가 고인이 건물의 대형상징물을 제작하는 등 육체노동에 종사했으므로 도시일용노임에 준하고 정년도 60세로 낮춰야 한다고 항소한 것이 발단이었다.
삼성화재 측은 예술계가 무기한 일인시위를 벌이는 등 거세게 항의하자 결국 10월31일 항소를 취하했다.
미술계 해외판로 개척 시동
미술시장이 장기불황에 빠진 가운데 해외시장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활발했다. 천안 아라리오갤러리가 12월10일 중국지점인 아라리오베이징을 오픈해 국내 화랑의 해외 직진출 시대를 활짝 열었다.
지난해 11월에 이어 올해 5월과 11월에 실시된 크리스티홍콩의 경매에서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회가 거듭될수록 좋은 성적을 내고있는 것도 우리 미술품의 해외시장 진출에 청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풍성했던 기획 전시
금호미술관의 영아티스트 프로그램과 창작스튜디오 운영, 세오갤러리의 작가공모 프로그램, 삼청동 일대 화랑들이 연합해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삼청미술제, 사비나미술관과 스페이스씨 등의 젊은작가 지원 초대전 등 화단의 미래를 가꾸는 기획들이 풍성했다.
철저한 스타작가 위주의 전시풍토에 대한 반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평가 받았다.
대형 전시로는 로댕미술관의 ‘나라 요시토모’와 로댕미술관의 ‘매튜 바니’, 김영섭화랑의 ‘다큐멘터리사진의 거장 살가도’전 등이 관심을 모았으며, 특히 이 달 들어 시작된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은 지난 해 샤갈 전에 이은 국제적인 대형전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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