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의 빈곤'.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내린 지난 1년의 평가이다. 원로 연극 평론가 한상철씨는 빈곤 양상에 초점을 맞춰, 아예 "나쁘게 이야기해 (연극이) TV 드라마로 가고 있다"고 압축하는 반면, 젊은 극작가 김명화씨는 "지금 연극은 반미학주의라는 시험대를 관통하고 있다"며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 연극은 지금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기에 있다는 것.
봄의 '서울연극제'와 가을의 '서울국제연극제' 등 양대 행사, 춘천 화성 포항 밀양 거창 의정부 등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렸던 12개의 국고 지원 지방 연극제 등은 연극이 이 시대에도 왜 축제여야 하는지 입증했다. 그 모든 행사에 투여된 국가 지원금 50억이 재정의 전부다시피 한, 따지자면 열악한 재정 형편이지만 연극인들에겐 분명 기회였다.
젊은 연극인들과 나란히 서서 부대끼기를 멈추지 않는 노장들은 또 다른 가능성이었다. 오태석씨의 '용호상박', 이강백씨의 '맨드라미꽃' 등은 이들의 존재 이유가 현실에 부단히 개입하는 데 있음을 웅변했다. 임영웅씨는 즉물적 행태가 만발하는 연극 현실에서 난해하기로 이름난 콜테스의 2인극 '목화밭의 고독속에서'를 초연, 특유의 뚝심이 건재함을 알렸다. 또 중견 극작가 윤영선씨의 '여행'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초청된 데 이어, 잇단 국내 무대에서도 큰 호응을 얻어 연말 연극계의 주요한 화제로 떠올랐다.
지난 10월 대학로에서 있었던 '대학로 공연 질서 확립 거리 정화를 위한 명예 헌장 선포식'은 연극계의 해묵은 염원, 즉 관객 증가와 질서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가 실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삐끼, 불법 부착물 등 명시적인 호객 행위는 뒷골목의 포르노 연극과 함께 사라졌다.
연극적 자원이 불어나고 있다는 명시적 증거는 없이, 합법적으로는 홍보 부스 두 곳만이 존재하는 대학로는 임의 게시물과 패스트푸드 광고로 앓고 있다. 삭풍 몰아치는 세밑, 자본의 주목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 한 이 얄궂은 예술 형식은 얼음장 아래 면면히 흐르는 맑은 물로 거듭날 새 봄을 기약한다.
올해도 뮤지컬계는 외형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12월을 제외하고도 총 공연 수는 906회(티켓링크 집계)로 지난해 742회를 훌쩍 넘어섰다. 올해 국내 무대에 올라간 전체 공연 중 53%가 뮤지컬일 정도. 전체 티켓 판매에 대한 공식통계는 없지만 뮤지컬업계의 올해 시장규모는 지난해를 훨씬 상회한다.
성장을 이끈 것은 대형 수입 뮤지컬과 라이센스 뮤지컬이었다.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7만 5,000명을 동원했으며 ‘오페라의 유령’은 19만 5,000명을 불러모았다. 내년 4월까지 국내 최장인 8개월 장기 공연에 도전하고 있는 ‘아이다’는 13만 관객을 이미 돌파했다.
소형 라이센스 뮤지컬의 활약도 눈부셨다. 400여 석 규모의 극장에서 공연하며 매진 행진을 기록한 ‘아이 러브 유’는 21만 5,000명을, ‘조드윅’(조승우)과 ‘오드윅’(오만석)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마니아를 양산한 ‘헤드윅’은 6만3,000명을 끌어 모았다. 두 작품의 성공은 중ㆍ소 극장 뮤지컬 공연이 대극장용 보다 안정적인 수익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성장에 따른 부작용과 아쉬움도 있었다. 지난해 공연계 최고 기획 상품인 ‘연극열전’을 벤치마킹해 기대를 모았던 신씨뮤지컬컴퍼니의 ‘뮤지컬 즐겨 찾기’와, 오디뮤지컬컴퍼니의 ‘뮤지컬 열전’은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지부진 했다. 뮤지컬 공연이 늘어나면서 공연의 전체 질이 떨어졌다는 비판도 있었다. 작품은 넘치나 쓸 배우가 없어 주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이 비일비재했다.
올해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이 선정되지 못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창작 뮤지컬은 부진했다. ‘행진! 와이키키 브라더스’ ‘로미오와 줄리엣’ ‘달고나’ 등 많은 작품이 앙코르 공연이었다. 처음 선보인 ‘밑바닥에서’ ‘뮤직 인 마이 하트’ 등은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새해에는 ‘노트르담 드 파리’ ‘십계’ ‘렌트’ 등 대형 수입 뮤지컬과 라이센스 뮤지컬 ‘미스 사이공’ ‘프로듀서스’ ‘지킬 앤 하이드’ 등의 공연이 잡혀 있어 창작뮤지컬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지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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