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판 도청 ‘X파일’이 이탈리아 중앙은행(BOI) 총재를 격침시켰다. 은행 인수ㆍ합병(M&A)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뇌물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아온 안토니오 파지오(69) 총재가 19일 오랜 ‘저항’을 끝내고 마침내 물러났다.
이탈리아 중앙은행감독위원회는 이날 “종신직을 보장 받은 파지오 총재가 사임의사를 밝혔다”며 “국가 이익을 위해 그 스스로 양심에 따라 결정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로마 교황청 지오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파지오 총재에게 퇴진 압력을 가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1993년 BOI총재에 올라 13년 째‘유아독존’ 시대를 누려 온 파지오 총재의 불명예 퇴진은 이탈리아 검찰의 감청 수사와 ‘X파일’에서 비롯했다.
올 봄 이탈리아에서 9번째로 큰 안톤베네타 은행 인수전이 벌어졌고 여기에 네덜란드 ABN암로 은행과 이탈리아계 BPI 등이 뛰어들었다.
당초 ABN암로 은행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BPI가 안톤베네타 은행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파지오 총재가 이탈리아계 은행이 인수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결국 소송까지 이르렀다.
이 소송 건 수사를 위해 검찰은 파지오 총재 자가용 안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고 파지오 총재가 부인 크리스티나에게 이 같은 내용을 설명하는 대화 내용을 입수했다. 검찰은 곧바로 이를 언론에 흘렸다.
‘X파일’에서 드러난 파지오 총재의 행위는 중립성을 목숨처럼 여겨야 할 중앙은행 총재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여론은 유럽 국가 중 재정 적자 폭이 가장 클 정도로 경제가 어려운 마당에 중앙은행 총재의 부도덕한 행위가 국가 신인도를 추락시킬 수 있다며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베를루스쿠니 총리는 그를 내치지 못했다.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극우보수정당 북부동맹이 “이탈리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럽통화동맹(EMU)과 유로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파지오 총재를 적극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지오 총재의 사퇴를 주장했던 도메니코 시니스칼코 재무장관이 사표를 던지며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압박했고 총리도 결국“국가 신인도 추락이 걱정된다”며 파지오 총재의 사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파지오 총재는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며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총재 임기가 종신직인데다 그의 뒤에는‘유로권 정부는 중앙은행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조항이 버티고 있었다.
검찰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최근 언론이 지난 주 구속당한 피오라니 은행장이 파지오 총재에게 제공한 고가의‘뇌물리스트’를 공개하면서 파지오 총재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 리스트에는 돔페레뇽 샴페인 30병과 카르티에 펜, 소니 TV, 캐시미어 스웨터가 들어있다. 또 그의 아내와 아들, 네 딸들도 피오라니 은행장으로부터 다양한 보석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종신직을 이유로 버티던 파지오 총재가 물러나자 마자 이탈리아 정부는 중앙은행 총재의 ‘권력 줄이기’에 나섰다. 이탈리아 내각은 20일 중앙은행의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심지어 소비자 단체와 야당 일부에서는 중앙은행의 최고 무기인 ‘반독점 규제 권한’을 중앙은행이 아닌 별도 기관으로 넘기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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