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난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부족함을 알다 보니 스스로를 식물학자라 말할 만큼의 자신이 없다. 따지고 보면 ‘공부’라는 말이 더 무궁한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난, 그냥 공부를 그것도 식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이 된 것이 좀 우습다. 일단 고등학교 시절, 이과이면서 공부를 그래도 좀 잘 한다는 축에 든 학생들이 생각하는 진로는 그 당시에도 의과대학이나 치과대학이었는데 내가 장래 희망에 이를 염두에 주지 않은 것은 순전히 이 대학들은 4년이 아니라 6년을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였는데, 아직도 난 공부하고 있고 그것이 직업이니 말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관련법에 명문화된 내 직업은 연구직 공무원중 연구관이다. 공부하는 공무원, 공부하면 나라에서 월급을 주는 사람.
난, 내가 초등학교에서부터 쭉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고, 시험 때가 되면 벼락치기 를 하여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번 같은 책이나 노트를 읽고 외우는 공부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색칠하고 줄긋고, 5번 읽고 나면 라면하나 끓여먹고, 10번 읽고 나면 TV프로 하나를 보고 하는 식의 장치를 마련해가면 공부했다. 난 아무 공부나 즐거운, 타고난 공부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간혹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는데 꼭 나오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언제부터 식물에 뜻을 두셨나요?” 어릴 때부터 특별한 배경에 뜻한 바 있어 남달리 자라왔다고 말할 수 있는 거창한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내겐 그런 화려한 과거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초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 뜻밖의 증언(?)을 들었다. “난 네가 식물학자가 될 줄 알았어. 넌 왜 그 당시로는(지금은 대개 그리하지만) 생뚱맞게 식물백과사전 같은 것도 보고, 나 모르는 식물 이름도 알고 그랬잖아.”
생각을 되짚어 보니 떠오르는 장면들은 있다. 서울토박이이지만, 어머니가 꽃을 좋아 하셔서, 봄이면 집 마당에 꽃씨를 심고, 철철이 피는 꽃들이 식탁이나 책상 위에 오르곤 했다. 그 시절 이미 나는 능소화는 줄기에 뿌리가 나서 벽에 붙어 올라가고 그것을 잘라 심으면 다시 새로운 능소화 한그루가 된다는 사실, 분홍색 분꽃 씨앗을 심어도 제각기 다른 색깔의 분꽃이 핀다는 사실, 수선화의 향기는 정말 맑고 은은하다는 사실 등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공부처럼 하지도, 이를 자각하지도 않았지만, 이미 식물공부의 시작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제도권 속에서 지루한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공부라면 입시공부가 전부이던 시절을 보내느라 나는 혹은 우리들 대부분은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사숙의 시기를 지니지 못한 채, 입시공부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으로 6년제 대학을 피했으면서 당연히 대학은 가려고 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모순이긴 하다.
많은 공부 중 식물을 공부하게 된 것은 필연과 우연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운명 같다. 어린 시절부터 하고자 했던 꿈들이 변천을 하게 되는데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 같은 것으로 이어졌던 것을 보면 나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엮어내는 일에 일관성 있게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조숙하게도 이러한 창조는 천재성을 동반하지 않는 한 늘 좌절을 맛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일찍이 절감하였고 그래서 자연을 계획하고 조성하는 분야가 새롭고 재미있을 듯싶어 학과를 골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남들이 많이 몰리는데 함께 기웃거리는 것을 싫어 한다).
대학원을 가면서 지도교수님은 내게 하나 뿐인 여학생이니 꽃을 공부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사실 꽃이란 식물을 식별(識別)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생식기관이니 결국은 지금 내가 공부하는 식물분류학으로 이끄신 것이다. 서울토박이인 나로서는 초기에 불리함이 많았다. 어머니 덕분에 식물에 일찍 눈을 떴다고 하지만, 시골에서 풀과 나무와 더불어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배우지 않아도 언제 꽃이 피는지, 먹을 수 있는지 등등 아는 것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초반의 열세는 금새 극복되었다. 학문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체계적으로 하나하나 쌓아가는 지식은 부정확한 상식을 한 번에 바로 잡아가 수 있다는 점.
식물을 공부하면서 희귀한 식물 하나를 찾아 온 산천을 헤매기도 하고, 한 산에 있는 모든 식물을 조사하기도 한다. 숲에서 열심히 식물을 들여다보노라면 불현듯 가슴이 턱 하고 내려앉을 만큼의 감동이 몰려들어온다. 나무 사이로 스미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식물의 세상은 내가 예전부터 막연히 동경해오던 가장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런 세상은 때론 내가 들어앉은 숲이라는 공간 전체가 되기도 하고, 카메라 앵글을 통해 보이는 꽃의 섬세한 부분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현미경을 통해 만난 미세한 씨앗의 껍질 무늬이기도하다. 그 자연이라는 우주를 체험하고 공부를 하고 있으니 어찌 내가 그 세상의 끈을 놓을 수 있으랴.
내가 평생 공부하는 식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마음에 심을 수 있었던 계기는 아무래도 대학원에 막 들어가서 참가 할 수 있었던 ‘한국의 야생화 대탐사’란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인 것 같다. 우리식물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던 시절 ‘한라에서 백두까지’란 부제로 1년 동안 전국 곳곳의 식물을 찾아 누비는 기회를 얻었다. 물론 어떠한 학술적인 깊이를 더해가는 조사는 아니지만 식물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학생시절, 앞으로 내가 평생 공부할 대상을 논문이나 도감에 있는 글자와 그림에 잎서 이 땅 곳곳에 피고 지는 살아있는 모습으로 전체를 아울러 직접 보게 된 것이다. 특히 국교가 없던 시절, 3국을 통해 비자를 받아 백두산에 첫발을 들여 놓던 순간, 정말 평생 도감에서만 보았던 그 많은 꽃들이 융단처럼 펼쳐져 나를 맞아 주었을 때의 감격은 두 번 다시 찾아 올 것 같지 않다. 그 일년동안 두 발로 뛰어 얻은 체험은 식물에 대한 첫사랑의 시작이며 지금까지 그 설레임은 여전하여 눈만 감으면 식물들은 가슴속 이곳 저곳에서 살아 피고 지고를 거듭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첫사랑에 대한 여운을 잊지 못하여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세상에 내어 놓은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나무 100가지’나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광릉숲에서 보내는 편지’와 같은 책들은 쓰는 동안 이땅의 풀 과 나무 하나하나와 끝없이 사유하며 그 사랑의 깊이를 더해갔던 시간들은 주었고, 그 대상이 무엇이든 함께 공유한 시간만큼 소중한 것이 없으니 이러한 시간들은 내 삶을 무작정 앞서간 저명한 식물학자로의 행로를 쫓아가기보다, 내가 공부하는 식물과 더불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식물학자로 이끌고 있는 듯 하다.
내겐 식물에 대한 개인적인 측면 이외에 공적이고 외적인 입장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 연구하라고 대통령명을 받은 공무원이므로. 이러한 역할은 내가 원하는 것만을 한번 마음껏 연구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라에서 필요에 의해 연구하라고 뽑아 놓은 것이니 그 연구는 어떠한 형태로는 개인연구자가 아닌 국가에 필요한 결과물을 낳아야 하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이다. 처음 국립수목원에 발을 들여 놓은 후, 10년 동안은 이땅에서 가장 어렵게 살아가는 희귀식물을 살리는 연구를 하느라 보냈고, 지금은 산림생물표본관이 생기면서 이를 맡게 되었다.
표본이란 죽은 식물이다. 첨단 생명공학이 아니면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에 난 고리타분하여 이제 뒷방으로 물러난 표본들을 싸안고 씨름한다. 하지만 매력적인 것은 10년전, 100년 전 그 식물들이 어떠한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를 증명해주는 식물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넘을 기록이니 이 또한 매력이 아니겠는가? 공부는 결국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이지만, 아무리 부족하여도 내가 하는 공부가 하나하나 쌓여 개인도 기업도 아닌 국가의 기반을 쌓여간다는 것도 내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해가면서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를 계속하는 있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올해 우리 연구실에서 함께 찾아낸 연구 성과 중에는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물고사리를 72년만에 찾아내어 그 생활사를 밝혀낸 일을 비롯하여 이미 샅샅이 뒤져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이 땅에서 아직 기록되지 않은 미기록 식물을 7종류나 찾아내어 지금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동료들과 행복한 고민중에 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없이 이땅에 자라는 그 작은 풀 한포기까지 찾아내어 알아보고 세상에 알리는 공부가. 그리고 자칫 이땅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인 말없는 식물들의 새로운 연구를 통해 삶과 터전을 마련해 가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이. 올 한해의 연구결과들을 차곡차곡 챙기고 나면, 다시 이 땅 곳곳의 식물들을 찾아 떠날 준비에 벌써 마음이 부산해진다.
● 이유미 실장은 누구
이유미 국립수목원 생물표본연구실장은 식물의 다양한 세계를 뛰어난 글솜씨와 말솜씨로 대중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사랑을 일깨운 식물분야 대중교육가로 유명하다.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조팝나무속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수목원을 거쳐 94년부터 국립수목원에서 연구관으로 일하면서 희귀식물의 보전과 복원, 증식에 힘써왔다. 2003년부터 생물표본연구실장을 맡아 식물연구의 기본이 되는 생물표본을 분류하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연구실은 2003년에는 국내 최초로 ‘벼과식물 도해도감’을 내놓았으며 희귀식물평가표를 만들어 냈다. 그가 혼자 또는 동료들과 함께 찾아낸 미기록종은 10종에 이르며 긴털비름 광릉고사리삼 사향엉겅퀴가 그 안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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