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남쪽 92㎞에 위치한 필리핀 해변도시 마비니의 신흥 부촌 ‘리틀 이탈리아’에는 주부가 없는 집들이 많다.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이탈리아에 가정부로 일하러 간 경우다.
마르셀리노 아부(49)씨도 아내 욜란다씨를 로마로 떠나보내고 자녀 셋을 키우고 있는 ‘역(逆)기러기 아빠’다. 하지만 처지가 우리나라 기러기 아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15년째 백수로 살아가고 있지만 가족을 먹여 살릴 궁리조차 해본 적이 없다. 아내 욜란다씨가 매달 보내주는 1만~3만 페소(190~570달러)의 생활비는 필리핀 평균 가정의 수입보다 낫기 때문에 이 정도면 떵떵거리고 살 만하다.
마비니에선 아부씨네처럼 외국에서 뼈빠지게 고생하는 가족 덕분에 먹고 사는 가정이 전체 가구의 30%나 된다. 필리핀 전체로 보면 8,400만 명 인구 중 700만 명 이상이 사우디아라비아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지로 돈을 벌러 나갔다. 필리핀은 멕시코에 이어 제2의 노동수출국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17일 노동력이 제1의 수출품목으로 자리잡은 필리핀이 해외 송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바람에 자생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필리핀은 이주노동자들의 고국 송금액은 2004년 85억 달러로, 필리핀에 대한 외국 원조와 직접투자를 합한 액수와 맞먹는다. 올해는 10월까지만 88억 달러로 지난해보다 27%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외국서 아내들이 노동력을 판 대가로 벌어들인 돈의 맛에 길들면서 성인 남성들은 아예 일해야겠다는 의지조차 버리는 등 심각한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 6%의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10.3%에 달한다. 마비니의 이주노동자 가구의 실태를 조사한 비정부기구 ‘아티카’의 에스텔라 디종-아노누에보 국장은 “가족 누군가가 외국으로 일을 하러 가면, 가장들은 놀기 시작한다”며 “필리핀 국민이 성실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 노동자의 3분의2가 여성으로, 아내 혹은 어머니가 없는 결손가정이 많다 보니 가족해체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고등학교 등에서 중퇴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이런 결손가정의 자녀들이다. 노동 전문가들은 “필리핀이 해외 송금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따져볼 때”라고 경고하고 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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