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그랬을까?”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의 진위를 의심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이처럼 엄청난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황 교수는 2004년 사이언스 논문으로 국제 과학계에 화려하게 데뷔했고 이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더욱이 몇 개의 데이터 조작 정도가 아니라 있지도 않은 줄기세포를 있는 것처럼 조작을 한다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생명을 건 모험이다. 황 교수는 왜 그런 엄청난 모험을 감수했을까?
먼저 2004년 사이언스 논문 성과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 교수는 2004년 세계 최초로 사람의 체세포를 복제한 배아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이는 “사람의 복제배아는 8세포기를 넘길 수 없다”는 기존 연구를 뒤집는 획기적 성과였다.
문제는 이 연구가 242개의 난자를 사용해 겨우 1개의 줄기세포주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돌파구를 넘은 것은 사실이되 난치병 치료에 응용하기엔 실용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수많은 난자를 확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난자를 얻기 어려운 외국의 과학자들에게서는 “난자만 충분하다면 하나쯤 못하랴”는 말도 나오는 상황이었다.
반면 2005년 사이언스 논문에 황 교수가 이 성공률을 10배나 높인 것으로 확인되자 국제 과학계는 환자맞춤형 배아줄기세포의 의미를 크게 재평가했다. “이제는 응용연구가 가능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관심은 결국 10월 ‘세계줄기세포 허브’라는 손에 잡히는 줄기세포 공급처로 결실을 맺었다.
황 교수의 과욕도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004년 연구 이후 복제배아줄기세포생산이 재연되지 않으면 연구가 그대로 사그라질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2004년 줄기세포주 1개를 확립한 뒤 아무리 반복해도 줄기세포를 다시 만들지 못했다면 황 교수팀은 더욱 초조했을 수 있다.
특히 황 교수의 연구에 대해 과학자라기보다 사업가적인 면모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검증을 끝내고 논문이 저널에 실리는 것을 우선시하는 과학자들과는 달리 황 교수는 먼저 대중적으로 알려 연구비를 투자받은 후 연구를 진행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황 교수는 1999년 체세포 복제소 영롱이를 탄생시켰을 때, 영롱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언론에 알려 기사화되었고 이후 ‘국내 최초의 체세포 복제 성공’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체세포 복제 선구자로 이름을 얻은 후 황 교수는 국정원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백두산 호랑이 복제를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황 교수는 이번에도 먼저 성과를 조작해 대중적으로 이름을 날린 뒤 이를 이용해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내 실제 연구를 진행하려고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황 교수팀은 아무런 연구를 하지 않으면서 헛논문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 배아줄기세포 외에 동물 복제, 이종장기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전폭적인 연구비와 제도적 지원이 있다면 연구가 원활히 진행되고 성과를 낙관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황 교수는 줄기세포 연구가 곧 성과를 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실체 없는 논문을 먼저 썼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