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대발견이 우연한 상상이나 직관에 의해 이뤄지는 예는 많다. 케쿨레는 꿈에서 서로 꼬리를 문 뱀을 보고 벤젠의 6각형 구조에 착안했다. 생명과학의 오늘이 있게 한 DNA 이중나선 구조의 해명도 우연한 착상에서 나왔다. 엄밀한 수학적 인과관계로만 짜여진 듯한 과학의 그물에도 상상력의 그물코가 살아 있다.
과학계가 세상의 한 부분이어서 세상의 온갖 모습이 투영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 행위’가 연구 대상에 집중됐을 때가 아니라면 대개 사회적 행위의 한 양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어렵고 딱딱한 껍질에 싸인 채 과학이 아닌 거짓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만 그런 신화가 오래 가지 않아 쉽게 깨어지는 것이 일반 사회와는 다르다.
황우석 교수의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빠른 속도로 종국으로 치닫고 있다. 사이언스 논문의 공동저자인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에 따르면 맞춤형 줄기세포가 있었는지 자체가 극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11개로 발표된 맞춤형 줄기세포 가운데 이미 9개는 존재근거가 희박해졌고, 남은 두 개마저 위태롭다. 황 교수가 “참담한 심정”이라고 밝혔다지만 그의 성과를 믿고, 몸을 던져 지원하고, 희망의 끈을 잡고 있었던 사람들의 심정에 비할 바 아니다.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맞춤형 줄기세포 신화는 상식을 누른 열광과 그에 근거한 과잉 기대가 키운 건 아니었을까.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장차 태어날 매력적 의료서비스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잠재적 소비자로서는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빨리, 값싸게 얻으면 그만이다. 세계적 화제를 부른 비아그라로 로슈가 엄청난 수익을 올렸지만 스위스 국민이 열광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과학ㆍ기술 발전의 혜택은 인류 전체가 누리고, 국제적 경쟁이 치열할수록 그 시기는 앞당겨진다. 그런 상식이 우리 사회 특유의 민족의식에 묻히면서 일방적 열광을 빚었다. 심지어 과학계 내부의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국가ㆍ민족 배신” “매국 행위”라는 비난이 들끓고 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 된 밥’이라는 전제 자체가 과도한 기대의 산물이다.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 추출ㆍ배양 기술이 확립되더라도 궁극적 세포치료의 길은 겨우 입구에 들어섰을 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세포치료의 길은 성체 줄기세포를 이용하는 방안도 있고, 이와 별도로 세포치료보다 더욱 정밀한 유전자 치료의 길도 있다. 세계의 연구자들은 이 여러 갈래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고 있고, 결승점은 아직 멀다.
2003년 인간 유전자를 이루는 DNA가 낱낱이 밝혀져 ‘게놈지도’가 완성됐을 때 금세 유전자와 단백질 구조가 해명돼 난치병 치료의 길이 열리리란 열광으로 세계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모가 밝혀진 주요 난치병은 없다.
하버드대 리처드 르워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영어에서 ‘Do it now!’의 ‘do’처럼 강력한 뜻의 단어는 없다. 하지만 ‘I don’t know.’처럼 대부분의 문장에서 ‘do’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도 분명히 문장의 요소로서 기능하고 있다. GTA, AGT 같은 암호가 때로는 아미노산 발린과 세린을 삽입하라는 지시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유전정보를 자르고 편집할 위치만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유전정보 사이에 간격을 두려는 것이기도 하다. 불행히도 우리는 세포가 여러 다양한 해석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지를 알지 못한다.” (제임스 르 파누 ‘현대의학의 역사’에서)
과잉 기대가 허상 키워
줄기세포도 분화 단계의 연구로 가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워낙 강한 열망이 우리 눈을 가렸을 뿐이다. 이제 가슴을 식히고, 흔들리는 신전을 떠날 때다. 실망이 크겠지만 절망할 것만은 아니다. 신전이 아닌 단단한 벽돌집의 기초가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닦이고 있다
황영식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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