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평범한 노인들은 적어도 한국의 동년배들보다 걱정이 적어 보였다. 물론 넓은 국토와 맑은 공기 탓도 있겠지만, 이들의 얼굴을 상대적으로 밝게 만드는 것은 결국 생계위협으로부터의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오래 산다는 것이 원망스럽지 않은’ 호주 노후시스템의 중심엔 ‘퇴직연금(superannuation)’이 있다. 이 달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 시행에 들어간 바로 그 퇴직연금이다.
가입여부가 기업(정확하게는 노사)의 선택에 맡겨져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호주에서 퇴직연금은 의무사항이다. 연금 역사가 100년이 넘는 호주에서 오늘날의 퇴직연금 시스템이 갖춰진 것은 1980년대 들어서지만, 의무가입제도(강제부담금제도)로 바뀐 것은 1992년이었다. 퇴직연금을 강제화하지 않고서는 기업주든, 근로자든, 정부든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호주 내 투자은행 및 보험사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투자금융서비스협회(IFSA)의 존 오쇼네시 부회장은 “퇴직 후 노년생활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정부가 지출부담을 안고 있는 노령연금(우리나라 국민연금)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강제부담금 제도로 바꾸게 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정규직 근로자의 98%가 퇴직연금에 가입했고, 임시직 근로자 가입률도 72%에 달한다.
연금적립요율도 점차 상향 조정돼 왔다. 당초엔 기업주가 종업원 임금의 3%를 연금보험료로 적립했지만, 현재는 9%까지 높아진 상태다. 3%로는 늘어나는 평균수명과 노후생계를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의 강제화와 적립률 인상으로 호주 연금시장은 현재 세계 4위 규모로 커졌다. 퇴직연금자산은 6월말 현재 7,400억 호주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86% 수준이며, 2020년이면 GDP대비 117%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처럼 호주의 퇴직연금에도 확정기여형(DC:적립액을 정해놓고 운용실적에 따라 돌려 받는 방식)과 확정급여형(DB:수령연금액을 미리 정해놓는 방식)이 있다. 하지만 DC형이 전체의 85%에 이를 만큼 압도적이다. 현지 금융기관 관계자는 “DC형의 경우 기업쪽 부담이 적은데다 전반적으로 투자수익률이 좋아 근로자들도 선호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호주 퇴직연금의 과거 20년간 평균 투자수익률은 연 10.7%로 물가상승률(3.9%)과 임금상승률(4.4%)를 크게 웃돌고 있다.
연금자산이 두 자릿수 수익률을 창출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채권과 같은 안전자산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짰다면 이 정도 수익률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채권이나 현금비중은 30%에 불과하고 주식이나 실물 등 ‘공격적 자산’에 70%를 쏟아 붓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노후생계와 직결된 연금자산을 주식중심으로 끌고 가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퇴직연금의 주식투자를 까다롭게 규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호주엔 퇴직연금을 ‘어디에 얼마 이상 투자하라’거나 ‘어디엔 투자하지 말라’ 같은 제한규정이 없다. 주식투자는 물론 해외자산에도 투자한다. 호주 금융건전성감독청(APRA) 관계자는 “투자대상 선택은 고객과 운용전문가가 정할 문제”라며 “다만, 운용기관은 투자정보와 위험성을 고객에게 정확하게 고지해야 하며 감독기관은 자산건전성만 엄격하게 감시하면 된다”고 말했다.
APRA관계자는 “증시의 부침에 따라 수익률의 등락은 있지만, 퇴직연금은 기본적으로 중장기 투자인 만큼 운용기관의 전문성, 고객의 정확한 정보획득, 감독기관의 엄격한 건전성관리가 뒷받침되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시드니=이성철 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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