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날씨가 찾아 들었다. 서울 지방의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12도로 떨어지고, 강풍까지 겹쳐 체감기온은 영하 18도에 이르렀다. 귀가 얼얼하다. 이런 와중에 호남지방에는 일주일 사이 두 차례나 폭설이 내렸다.
눈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비닐하우스나 인삼 재배시설의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지기도 전에 기습폭설이 퍼붓고, 그 눈이 추위로 얼어붙고,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렸다. 손쓸 길이 없어 발만 구르고 있을 농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번 추위와 호남지방의 폭설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반도 북서쪽의 대륙성 고기압이 예년보다 일찍 발달한 반면, 북동쪽의 저기압이 쉽게 소멸하지 않고 있다.
이런 서고동저(西高東低)의 기압배치로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대륙의 차가운 공기가 한반도로 밀려들고 있다. 기압차가 크니 바람이 세고, 체감온도가 낮아진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서해 바닷물이 예년에 비해 아직 따뜻해 증발이 활발하다. 그 수증기가 대륙에서 밀려온 찬 공기와 만나 대량의 눈구름이 되어 호남지방에 폭설로 내렸다.
■언뜻 그럴 듯하지만 과학에 어두운 눈에도 명확한 인과관계의 설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서고동저의 기압배치나 서해의 바닷물 온도 등도 결과적 현상의 하나일 뿐 원인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서 자다가 화상을 입었는데 “불이 나서 그랬다”고 설명할 뿐 왜 불이 났는지는 밝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늑장 대설주의보로 피해가 커졌다는 볼멘소리와 함께 슈퍼컴퓨터는 잠재우고 있느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빚는 기상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지도를 보여주며 이건 산이고, 이건 강이라는 식의 기상해설에서는 벗어날 때가 됐다.
■대설주의보 하면 으레 어린 시절의 아늑한 겨울 밤을 떠올렸다. 그런 기억은 도회의 눈보라에 많이 흐려졌다. 그래도 ‘어허, 눈이 내리는데/ 눈이 내가 걸어온 길을 지우는데/ 내가 무엇을 더 서러워 할 것인가’(정철훈의 ‘대설주의보’에서) 정도의 그리움은 남아 있었다. 그것마저 스산한 겨울이 덮는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최승호의 ‘대설주의보’에서). 폭압의 시대는 갔지만 세상은 여전히 곳곳에 주의보와 경보가 도사리고 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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