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난데없이 학창시절 생물시간에 배웠던 이 지극히 단순하고도 징그러운 생물이 떠올랐다. 원생(原生)동물에 속하는 ‘아메바’란 놈. 고정된 형체도 없이 젤리 형태로 흐믈흐믈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러면서 자유자재로 굴신(屈伸)하는 그 기묘한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릴없이 부유하다 먹이감이 걸렸다 싶으면 순간, 어느 방향으로든 위족(僞足)을 뻗어내 몸 전체로 먹이를 감싸 먹어버리는 무시무시한 포식자의 모습이다. 워낙 원시적인 단세포 동물인지라 배우자 같은 외부요인 없이 그저 무성생식으로, 즉 자기분열로 무한 증식한다.
눈치 빠른 이라면 벌써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의 ‘여론’, 또 ‘언론’이란 것의 속성이 이 아메바와 기막히게 닮았다는 생각으로.
지난 달 21일 ‘PD수첩’의 보도자료 등으로 황 교수팀의 부적절한 난자채취 과정이 드러나고, 며칠 뒤 노무현 대통령의 기고문을 통해 ‘PD수첩’이 황 교수의 연구성과 자체를 문제 삼으려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나타난 여론은 질릴 만큼 폭발적이었고, 일방적이었다.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극단적 언사와 제안들이 증폭과 복제를 거듭하면서 그 자체가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됐다. 익명성에 근거한 무책임성, 다른 이에 대한 잔인한 공격성, 제한적 정보에 근거한 억측과 상상력의 자기확대 등 일찍이 사회학자 G. 르봉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 않았던 ‘군중’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됐다.
사실 인터넷이 여론형성 기능을 떠맡게 되면서 많은 학자들은 과거 한낱 이상(理想)으로 포기했던 이성적인 ‘공중’의 도래를 은근히 기대했다. 공간적으로 떨어진 네티즌들은 동일 장소에 모인 군중과 달리 각자가 자유롭게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 합리적인 여론조성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최근 인터넷시대의 대중을 지칭하는 ‘참여군중’ ‘똑똑한(smart) 군중’ 개념도 이 같은 ‘공중적 시민’에 대한 희망을 담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표현수단의 변화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의 논의구조는 별로 진보하지 않았음을 절망적으로 보여 주었다.
언론은 한술 더 떴다. 주장과 사실을 분리하고, 억측과 진실을 구분함으로써 건강한 여론형성을 도왔어야 할 언론이 도리어 분별을 잃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PD수첩’의 취재태도에서부터 드러난 무분별한 공격성이 이후 언론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서로 간에 난타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과학적 사실에 대한 논란조차 보수.진보 논란으로 환원되는 웃지 못할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보수언론에서 더 심해 ‘황우석 비판론자=기득권에 대한 불만자=좌파’ 따위로 읽히는 기사들이 거침없이 지면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정한 방향에 따라 반대편 정황 증거들을 깔아뭉개거나 비트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졌다.
일단 사태가 진정국면에 접어들었지만 또 어떤 변수에 의해, 어떤 사단이 벌어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서울대의 검증을 지켜보는 심정은 그래서 여전히 두렵고 조마조마하다. 이제 감정을 가라 앉히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번에는 모두가 제발 판단의 균형을 잃지 말자는 뜻에서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 나오는 짧은 경구를 옮긴다.
‘많은 이들이 싫다 해도 잘 살필 것이며, 많은 이들이 좋다고 해도 역시 깊이 살필 일이다.’(衆惡之必察焉 衆好之必察焉)
이준희 문화부장 jun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