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남은 달력에 송년회를 빙자한 술 약속이 칸칸이 메워지고 있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들이붓는 술잔 공세에 시달리다 보면 제아무리 말술을 자랑하는 주당이라도 녹초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나라 술 문화의 깊이와 다양함은 세계 어느 나라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다. 폭탄주만 해도 변형된 수소폭탄주 중성자탄주 드라큘라주 등 수십 가지에 이르며 해마다 이름도 신기한 새로운 폭탄주가 탄생하고 있다. 이런 유별난 음주 문화 탓에 알코올성 간 질환자도 매년 늘고 있다.
2002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간 질환으로 인한 40대 남성 사망률은 여성의 9배에 이른다. 간암을 제외한 간 질환만 집계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술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피할 수 없다면 맞서는 수밖에. 술은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간 손상의 정도가 달라진다.
▲ 간 비만의 주범, 술
사람들이 독한 술을 마시면서도 간 질환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간이라는 장기 자체가 증상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간은 재생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간 질환에 걸려서 70~80%를 떼내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과음을 하면 재생 속도보다 파괴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에게서는 이러한 재생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알코올로 인해 간이 파괴되는 1차적인 이유는 알코올 분해 과정 중에 생기는 독성 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 때문. 이 성분은 간 조직을 직접 파괴해 간이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든다.
이렇게 간이 제 기능을 못하면 아세트알데히드가 더욱 쉽게 간을 공격하는 악순환이 이어져 알코올 및 섭취한 음식물이 대사되지 못하고 지방의 형태로 간에 쌓이는 알코올성 지방간에 걸리게 된다. 보통 지방의 무게가 간 전체 무게의 5% 이상이면 지방간으로 진단하며, 대체로 만성 음주자의 75% 이상에게서 알코올성 지방간이 발생한다.
▲ 과다하면 간염 간경변 유발
술을 과다하게 마시면 지방간뿐만 아니라 간염 간경변증 등도 생기게 된다. 알코올성 간 질환의 경우 잠시 금주를 하면 상태가 호전되지만 알코올성이 아닌 다른 간 질환과 구별이 쉽지 않은데다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알코올성 간 질환자의 10~30%는 알코올성 간염으로, 8~20%는 알코올성 간경변증으로 발전하는데, 알코올성 간염은 건강한 간으로 회복될 수 있지만 간경변증은 간암으로 악화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간경변증 환자는 1년에 4회 정도는 간암 검사를 받는 것이 필수다. 알코올성 간경변증은 간염 바이러스로 인한 간경변증보다 경과가 나빠 서양에서는 말기 간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50%가 알코올성 간경변증 때문인 것으로 조사됐다.
▲ 간이 보내는 신호
지방간인데도 계속 술을 마신 사람에게 식욕부진, 체중 감소, 구역질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이미 간경변증일 가능성이 높다. 알코올성 간염이나 간경변증 환자의 경우에는 복수가 차거나 비장이 커지고, 상체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도 한다. 알코올을 많이 마시면 영양 결핍과 체내 호르몬 변화로 인해 유방이 커지는 여성형 유방증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지방간은 뚜렷한 증후가 없기 때문에 기회가 닿는 대로 간 효소수치 검사를 받고, 술을 절제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만일 오른쪽 갈비뼈 밑이 묵직하다거나 전에 없이 술을 마신 뒤 피로가 심하다면 한 번쯤 지방간을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
▲ 술 마시는 요령
지방간을 비롯한 알코올성 간 질환의 주된 발병 원인은 간이 처리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알코올을 마시기 때문이다. 알코올성 간 질환 예방에는 원인을 제공한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최선책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셔야 한다면 요령 있게 마셔야 한다.
과거에는 폭음하면 지방간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그보다는 소량이라도 꾸준히 음주하는 것이 더 치명적이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당뇨병 등 대사성 질환자는 매일 소주 1잔이나 맥주 1,000㏄를 며칠만 마셔도 지방간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건강지침으로 정해놓은 ‘덜 위험한 음주량’은 막걸리 2홉(360㎖), 소주 2잔(100㎖), 맥주 3컵(600㏄), 포도주 2잔(240㏄), 양주 2잔(60㏄)이다. 이는 하루에 간이 해독할 수 있는 수치를 약간 밑도는 수준이며, 이 이상은 ‘과음’에 해당돼 지방간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간을 날씬하게 유지하려면 최소한 2~3일에 하루 휴간일(休肝日)을 갖는 것이 좋다. 또한 안주를 선택할 때 단 음식과 기름기가 많은 음식은 피하고 간세포 재생을 돕는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
<도움말=삼성서울병원 소화기내과 백승운 교수, 강남베스트클리닉 이승남 원장>도움말=삼성서울병원>
▲ 간에 좋은 음식 '조개·새우·낙지' VS 나쁜 음식 '달고 기름진 음식'
평소 혹은 음주 전후, 잘못된 식습관은 간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기름진 안주, 설탕 음식, 흰 쌀, 흰 밀가루 위주의 식생활은 노폐물을 많이 만들어 간을 피로하게 하고 지방간을 유발한다. 또 인스턴트 및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첨가제나 과일과 야채에 묻어 있는 잔류 농약 등도 간을 과로하게 하는 원인. 피로회복을 위해 많이 먹는 간장약도 간에 부담을 줄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음식 섭취량. 간세포 재생과 효소 합성을 촉진시키기 위해 단백질 공급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과잉 섭취한 단백질은 간에서 대사(代謝)되기 때문에 간의 피로를 증가시킨다. 미처 대사되지 않은 단백질의 중간 대사물인 암모니아가 간세포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간의 건강을 고려한다면 담백하고 지방질이 적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비타민, 미네랄, 엽록소, 효소 등은 간세포를 재생하고 신진대사를 촉진해 간 건강에 도움을 준다.
양배추, 샐러리, 파슬리 등에 들어 있는 각종 비타민은 간 기능을 활성화하는데 사과나 레몬, 꿀 등을 믹서에 함께 넣고 갈아서 마시면 좋다.
대합탕이나 조개국은 술안주와 해장음식으로도 각광을 받는데 이는 조개류에 많이 함유돼 있는 타우린 덕분. 타우린은 간의 피로를 풀어주고 해독능력을 북돋아주는데 모시조개, 바지락, 대합 등의 조개류와 새우, 낙지에 풍부하다.
또한 건강물질로 알려진 키토산을 섭취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키토산은 세포에 필수적인 아미노당을 공급해주며 지친 간이나 해독기능이 상실한 간 기능을 회복시킨다.
한편 한방에서는 당귀, 용담초, 결명자, 차전자(질경이), 산수유 등의 한약재를 차로 끓여 복용할 것을 권한다. 산수유는 간을 따뜻하게 해주어 기능을 회복시키고, 용담차나 결명자는 간에 몰린 열을 내려주고 기능을 북돋아 준다.
▲ 지방간 환자의 식이요법
① 음식 섭취량을 줄이고 정상체중을 유지한다.
② 갈비, 삼겹살, 치킨, 장어, 탕 종류, 튀김, 부침개, 잣, 땅콩 등 기름진 음식섭취를 줄인다.
③ 케잌, 크림빵, 도우넛, 파이, 과자, 사탕, 초콜릿,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등 단 음식을 피한다.
④ 신선한 채소, 해초류, 잡곡 등은 충분히, 과일은 적당량만 먹는다.
⑤ 생선, 두부, 살코기, 껍질 벗긴 닭고기 등 고단백질 음식을 섭취한다.
⑥ 술을 자주 마시면 고혈압이나 뇌졸중의 발병률이 높아지므로 삼간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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