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면 수달, 노루, 산양 등 희귀한 야생동물이 냇가에 나와 물을 마시고 노닐거나 마을 근처 밭에까지 내려와 농작물을 파헤치기도 한다. 동이 트면 밤새 돌아다닌 동물들 발자국이 남아있는 밭에서 마을주민이 삼삼오오 퇴비를 주기도 하고 산등성이에 심어놓은 야콘을 캐면서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밤에는 야생동물의 낙원이 되고 낮이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곳. 바로 국내 최대 생태경관보전지역인 경북 울진군의 왕피천의 모습이다. 지난 10월 말부터 두 달간 왕피천 구석구석을 누비며 야생과 인간이 공존하는 이곳의 생태를 뉴스화보로 담았다.
“새끼 수달이 물위에서 배를 통통 치며 노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요.” 왕피천을 처음 찾았다가 만난 왕피리 병위마을의 문채원씨(33)는 기자가 ‘수달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노루가 어떻게 우는지 아세요? 모습은 귀여운데 꽥꽥대는 소리에 잠을 못자요. 어두워지면 마을로 내려와 고춧잎을 다 따먹어 밭에 전깃줄을 치기도 했지요.” 옆에 있던 주민들도 하나 둘 야생동물에 대한 경험을 털어놓기 시작할 때, 한 주민이 기자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속사마을로 안내한다.
속사마을의 마스코트 정글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정글이는 새끼 때 상처를 입어 움직이지 못하던 것을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치료하고 우유를 먹여 키운 너구리다. 여전히 야생의 습성이 남아있어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고 낯선 사람들이 주위에 오면 몸을 숨기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 손 위에 먹이를 맛있게 먹는 등 마을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왕피리 주민들과 야생동식물은 때때로 서로에게 놀라기도 하고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아름다운 공존을 하고 있다.
경북 영양군과 울진군을 가로질러 동해로 흐르는 67.75km의 왕피천은 1급수에만 서식하는 버들치가 있고 연어와 은어가 회귀하며 수달과 산양을 비롯한 많은 멸종위기 동식물이 살고 있는 남한 제일의 야생낙원이다. 하천의 상류나 중류는 산간협곡을 이루어 평지가 거의 없으나 광천과 매화천이 합류하는 하류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원도 동강보다 1.6배에 달하는 왕피천 유역은 울진 주민들 조차 두메산골로 부를 정도로 첩첩산중 외진 곳이다.
왕피천이란 이름도 옛날 부족국가 시절에 왕이 이곳으로 피신해 숨어 지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환경부는 동강보다 더 뛰어나다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 10월 이 일대 약 3천만 평을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을 지정했다.
주민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는 보전지역 중심부에 사는 900여명의 주민 가운데 90%이상이 친환경 농업을 하고 있는 지역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농복구회 신동우(45) 사무국제는 ‘처음부터 친환경농업을 하고 있어서 보전지역 지정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한농복구회는 94년 5월에 왕피리에 들어와 환경회복과 유기농업, 사람회복을 모토로 화학비료와 제초제 등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농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숨겨진 자연의 보고(寶庫)인 이 곳의 진정한 보전작업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언론에 알려지면서 왕피천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며 그만큼 환경훼손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동수골 마을을 넘어가는 길엔 탄산리튬이란 광물을 채굴을 하기위해 산림을 훼손하며 굴을 파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됐는데 어떻게 채굴허가가 났는지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생환경이 살아있는 왕피천 일대를 후손에게 자랑스런 유산으로 길이 물려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역 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환경보전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홍인기 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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