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6세 미혼의 영국인이지만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한국말은 그 덕분에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 어지간한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2년여 살면서 한국인의 언어습관에 여러 차례 놀란 경험이 있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 대한 한국말이 버젓이 있는데도 영어를 써야 지식인 같다는 생각인지 모르겠다. 왜 사과를 애플이라 하고 참외를 멜론이라고 하는 걸까. 달력이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캘린더라 하고 잡지는 매거진이라 하며 일기조차 다이어리라고 한다.
얼마 전 한국 친구가 “네가 미팅멤버 메이드를 해라”고 하여,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나에게 모임을 주선하라는 뜻이었다. 미팅 멤버는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굳이 ‘made’라고 하여야 할까.
또 하나,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 너무 발음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미팅은 ‘미링’이 되고 워터는 ‘워러’가 된다. 한번은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짓자 “왜 그렇게 센티하냐”고 묻는다. 센티멘털(sentimental)을 뜻하는 것 같은데 정말 깜짝 놀랐다. 우리도 단번에 그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데, 대단하다는 느낌을 넘어 이래도 되는가 싶었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꼽을 수도 없다. 미장원에서는 아예 영어로만 말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다. ‘가위손’이나 ‘머리방’이라는 미장원 간판을 보면 차라리 반갑고 정겨운 생각이 든다.
그나마 대부분 ‘콩글리시’ 투성이여서 원어민으로서는 짜증까지 날 정도다. ‘면도‘는 세이빙(shaving)이라 하고, 컨디셔너(conditioner)에 해당하는 샴푸, 린스도 춤을 춘다. 커팅(cutting)은 이미 굳어진 한국말 같다.
한국인들은 언어의 마술사 같다. 단어의 축약은 ‘놀랄 노’자다. 우리는 할인을 뜻하는 discount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데 DC로 줄이고, 캠퍼스 커플은 CC, 동아리 연수는 MT다. 또한 오피스텔은 오피스(office)와 호텔(hotel)의 합성어인 것 같고, 원피스(one-piece), 헤어샵(hairshop) 등도 콩글리시라고 하겠다.
‘영어가 객지에 나와 고생한다’는 말이 있듯이 뜻이 변해버린 단어들도 많다. 도움을 준다는 뜻의 서비스는 음식점에선 ‘공짜’로 쓰인다. 랩탑(laptop)은 노트북(notebook)으로 대체된다. 10대 학생들도 “오버(over)하지마”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았다. 뭔가 일이 잘 풀려 괴로울 때는 “쿨(cool)하라”고 한다. 이런 말은 듣고 난 후 잠시 지나서야 의미가 짐작된다.
‘영어 공용화’ 문제가 논란이 될 만큼 국제화시대이니 영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한국말에 대해 모른다거나 일부러 쓰지 않는다면 문제가 아닐까.
프랑스어를 지키려는 프랑스 한림원의 노력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파이팅을 ‘아자’로, 웰빙을 ‘참살이’로, 네티즌을 ‘누리꾼’으로 바꾸어 쓰자는 운동을 매스컴이 앞장서고 기관이나 단체들도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나미 모리스 성균관대 국제교류교육센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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