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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세상/ 초대작 '태풍' 화려한 볼거리 빈약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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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세상/ 초대작 '태풍' 화려한 볼거리 빈약한 이야기

입력
200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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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와 태국 러시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광.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쾌속으로 질주하는 모터보트. 귀가 멍멍할 정도로 실감나는 총소리와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교하게 짜여진 총격전. 거대한 화물선을 금방이라도 삼킬 것 같은 집채만한 파도와 비바람…

국내 영화사상 최대인 150억원을 쏟아 부은 곽경택 감독의 신작 ‘태풍’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한다. 이야기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빼놓으면 한 편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례적으로 자국영화 시장점유율 50%를 넘기면서도 할리우드의 물량 공세 앞에서는 아직도 오금을 저리는 한국영화의 ‘대물 콤플렉스’를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의 위용을 자랑한다.

탈북자인 씬(장동건)이 이끄는 동남아 해적일당이 미국의 주요 핵 부품을 탈취하고, UDT출신의 최정예 해군 대위 강세종(이정재)이 이들의 정체를 파악해 추적하는 도입부부터 영화는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숨가쁘게 전개되는 추격전을 담은 감각적인 화면과 편집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아찔한 속도감과 박진감을 선사한다. 극의 전개와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초반부는 한국영화 사상 명장면으로 손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태풍의 한 가운데에서 거친 파도를 헤치는 화물선 안에서의 총격전도 압권이다. 첨단 장비로 무장한 채 칠흑 같은 어둠과 성난 태풍의 비바람을 뚫고 배에 침투하는 해군 장교들의 절도 있는 움직임도 여느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힘들다. 씬이 두 개의 태풍을 이용해 핵 폐기물을 남한에 투하하려 한다는 설정도 신선하다.

이렇듯 남부럽지 않은 규모와 볼거리를 자랑하나 ‘태풍’의 이야기 그물코는 성글다. 150억원이라는 제작비가 화려한 시각적 즐거움과 함께 그 만큼 관객들의 가슴까지 움직일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영어로 죄를 뜻하는 씬과 성군(聖君)의 대명사인 세종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정반대의 두 인물이 대립각을 세우는 이야기 전개가 다소 평면적이다.

영화는 20년 전 남한 정부의 냉정한 조치로 귀순에 실패한 씬의 처참한 가족사를 통해 한반도의 아픈 현실을 담아내지만, 쉬 가슴을 파고들지는 못한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남한 정부를 향해 터뜨리던 씬이 스스로 대량 살상 계획을 접는 이유도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선악의 첨예한 대결에서 비롯되는 도식적인 결말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해도 요령부득이다. 무장공비와 맞서다 순국한 아버지를 둔 세종의 투철한 국가관도 너무 반듯해 거북스럽다.

미국의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국정부와 미국의 음험한 세계 전략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목도 철 지난 유행가처럼 새로운 감동을 주지 않는다.

뭐니뭐니 해도 ‘태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장동건의 연기다. 강인한 이북 사투리로 “사람 고기 먹어본 적 있음메?”라는 금속성 대사를 내뱉는 그는 ‘친구’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보여주었던 호연이 한 두차례 나올법한 우연이 결코 아니었음을 입증해 보인다.

특히 누나 명주(이미연)와 20년 만에 상봉할 때 핏발 선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는 연기는 그가 더 이상 꽃미남 스타가 아니라, 확실한 ‘배우’로 한국영화계에 우뚝 섰음을 의심하지 않게 만든다.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곽 감독의 연출의도는 일단 성공했다. ‘태풍’은 한국영화도 이제 장대한 스케일을 화면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태풍’이 건져낸 성과에 대한 심판은 이제 관객의 몫이다. ‘태풍’은 한국영화를 또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키거나, 아니면 또 하나의 재난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승부수를 던졌다. 14일 개봉. 15세.

● 숫자로 본 '태풍'

150억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만큼 '태풍'은 여러모로 많은 기록을 세웠다. 숫자를 통해 '태풍'의 위력을 가늠해본다.

1-'태풍'은 1961년 중앙정보부 설립 이래 44년간 영화 촬영을 허가하지 않았던 국정원을 최초로 필름에 담았다.

10-지난해 11월초 크랭크인 한 태풍의 촬영기간은 10개월. 한국영화 사상 최장기 촬영기간이다.

40-마케팅 비용도 만만치 않다. 현재 40억원을 잡고 있지만 영화가 장기상영에 들어갈 경우.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갈 수도 있다. 역시 역대 최대.

138-한국 영화의 평균 촬영 회차는 40여 회. 태풍은 평균의 세 배가 넘는 138회에 걸쳐 촬영을 했다.

300-부산 수영만에서 군중을 헤집으며 강세종이 씬을 추격하던 장면에 동원된 장동건 팬클럽의 엑스트라 수. 이들은 국내 팬이 아닌 일본과 중국인으로 이루어졌다.

520-'태풍'의 개봉관수는 무려 520개. 영화진흥위원회가 집계한 전국 1,540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로 역대 최고다. 이전은 2003년 '태극기 휘날리며'의 513개.

1,000-김블 장치(선박 혹은 항공기와 같은 큰 규모의 세트를 상하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장치) 위에 올린 대형선박 세트의 평수. 전남 고흥군 한국항공우주연구원 격납고에 설치한 이 세트 역시 실내세트로서는 국내 최대다.

1,200-태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물의 양은 자그마치 1,200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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