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치는 소년’(1979)은 김종삼(1921~1984)이 작고하기 다섯 해 전에 나온 시선집이다. 앞서 출간한 두 권의 시집 ‘십이음계’(1969)와 ‘시인학교’(1977) 같은 데서 작품을 추려냈다. 동갑내기 시인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가 그렇듯, ‘북 치는 소년’도 한 시인의 정신세계를 비교적 요령 있게 농축해놓은 표본이다.
김종삼의 연보는 시인의 고향을 황해도 은율로 기록하고 있다. 평양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일본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뒤 성년 이후의 삶 대부분을 남한에서 살았으므로, 그의 정신을 빚어내는 데 고향이 세세히 개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 이후에 시인이 고향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시 전반에 드러나는 부유(浮游)의 분위기와 얼마쯤은 줄이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 자신의 체험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물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민간인’ 전문)는 진술은 단박에 독자들의 가슴을 에어내며 실향민과 고향 사이에 놓인 검디검은 심연을 환기한다.
김종삼의 시들은 그가 제 삶의 터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을 거듭 보여준다. 그 삶의 터전이 그의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한 페르소나가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나의 본적’)라고 변죽을 울리는 그 고향은 딱히 휴전선 너머 은율이 아니다.
같은 화자가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라고 말하는 데서도 설핏 비치듯, 그 고향은 어떤 지순(至純)의 관념 세계이고, 그 세계는 유라시아 대륙 저편에 놓여있다. 실제로 ‘북 치는 소년’에선 수많은 유럽-북미계 고유명사가 와글거린다. 그 서양 고유명사들은 대개 음악가들이나 화가들의 이름이다.
김종삼의 향서(向西) 취향은 우리가 이미 비판적으로 읽은 바 있는 박인환을 외려 넘어선다. 생의 토양을 박탈당했다는 사정이 김종삼을 과격하게 밀어붙였을 수도 있겠으나, 그의 향수가 향하는 곳은 은율이라는 지리적 공간이라기보다 유럽에 본적을 둔 어떤 예술의 공간이다.
그런데도 김종삼의 시가 박인환의 시에 견주어 덜 거북스럽게 읽히는 것은 그의 서양 취미가 박인환의 것보다 사뭇 익혀져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호에 대한 퍼스의 분류를 훔쳐오자면, 박인환의 박래어들이 대체로 도상(icon)이나 지표(index)에 그친 데 비해, 김종삼의 박래어들은 드물지 않게 상징(symbol)에 이르렀다.
김종삼은 외국 이름이나 외래어들을 그려다 붙이며 제 교양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 의지해 정서적 확장과 공명을 이뤄내는 데 자주 성공했다. 말하자면 김종삼은 그 고유명사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물론 박인환도 영 뜬금없이 외래어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박래어들을 향과 육즙이 듬뿍 담긴 상징의 과실로 익히는 데, 박인환은 김종삼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박인환이 누린 생애가 김종삼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종삼의 시에 이름을 들이미는 사람들이 (동료 시인들까지를 포함해) 거의 다 예술가라는 사실로 돌아가자. 그의 마음 속에서 문학과 음악과 조형예술은 또렷한 경계가 없었던 듯하다.
아니 그는 음악의 세계에 조형을 부여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음악은 김종삼의 시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지만, 정작 그의 시는 음악보다 회화에 가깝다.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김종삼의 시는, ‘아틀리에 환상’의 화자가 말하듯, “소묘의 보석길”을 따라간다.) ‘마라의 <죽은 아이를 추모하는 노래> 에 부쳐서’(여기서 ‘마라’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다)라는 부제를 단 ‘음악’은 본디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바탕을 둔 말러의 연작 가곡을 다시 시로 환원하고 있고, “어디로 이어진지 모를/ 대철교의 마디마디”(‘가을’)는 “요한의 칸타타”에 견주어진다. 죽은>
‘가을’의 화자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그저 ‘요한’이라고 부른 것이 바흐 집안에 이름난 작곡가가 많아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이 위대한 작곡가를 ‘요한’이라고 부를 만큼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틀리에 환상’의 화자는 베토벤을 ‘루트비히 판’이라고 부르고 있다.
꽤 긴 동안의 생업이 음악과 관련이 있었던 사실과도 무관치 않겠지만, 김종삼의 시에는 음악가들이 자주 등장한다. 뉴욕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헐더 라샨스카(그의 시에서는 ‘라잔스카’나 ‘라산스카’로 표기된다)를 김종삼은 특히 편애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여자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시를 세 편 썼다. 그 가운데 한 편이 ‘북 치는 소년’에 실려 있다.
“미구에 이른/ 아침// 하늘을/ 파헤치는/ 스콥 소리”가 전문(全文)인 ‘라잔스카’에서 김종삼은 그녀의 예술세계를 기계 소리와 함께 밝아오는 새벽녘의 풍경에 견줬다.
이 시집에 실린 ‘그리운 안니 로리’도 라샨스카가 부른 ‘애니 로리’에서 이미지를 얻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1919년 컬럼비아사에서 취입한 앨범 ‘애니 로리’는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북치는 소년’에는 묶이지 않았으나, ‘라산스카’라는 제목을 지닌 또 다른 두 편의 시에서 화자는 이 소프라노 가수에게 들려(憑依) 노래한다. “인간되었던 모진 시련 모든 추함 다 겪고서/ 작대기를 짚고서” 서럽게 노래한다.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고. 가슴이 저리다. 이런 시행을 보면, 시인이 생전에 종교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시세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기독교적이다.
“흘러가는 요단의 물결”(‘고향’)이라거나 “사해(死海)로 향한/ 아담교(橋)를 지나”(‘시작 노트’) 같은 시행들도 그렇지만, 그의 시에 드물지 않게 나오는 사원이나 교회당이나 영아(지옥 변방의 림보는 세례 받기 전에 죽은 아이들의 거처다)도 그런 종교적 분위기를 거든다.
그러나 김종삼의 시세계는 대체로 기독교와 거리가 있다. 그의 영혼은 뿌리내리지 못하는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표제시 ‘북 치는 소년’에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이라는 시행이 보인다. 젊은 시절의 김현은 이 대목을 시인의 미학적 자기반성의 맥락, 자기비판의 맥락에서 해석한 바 있지만, 그것은 이 명민한 평론가의 많지 않은 오독 가운데 하나인 듯 싶다.
차라리, 김현의 짐작과는 반대로, 김종삼이 추구한 것 자체가 바로 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이 시의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만이 아니라 김종삼의 시세계 전반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시 말해 무구한 아름다움으로 반짝인다. 그 아름다움은 무구한 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다.
김종삼의 육체는 남한 땅에 발을 딛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이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따금 그 마음은 두고 온 북녘 고향 땅을 향했고, 자주 위대한 예술가들의 고향인 유럽 땅을 향했다. 아니, 유럽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그의 마음은 그 예술가들의 상상된 마음에 들려 거기 갇혀있었다.
아니, 이 말도 옳지 않다. 그의 마음은 예술의 세계에 갇혀 있으려 애썼으나, 그는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만든 얘기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 된다/ 우주복처럼 월곡(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시각 미정”(‘올페’ 전문). 김종삼은 시의 세계에서조차 둥둥 떠 있었다.
그러니까 김종삼을 실향민이라고 할 때, 그가 잃어버린 고향은 황해도 은율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본적이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그는 (거의) 단독자였고, 무적자(無籍者)였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할 뿐, 단독자와 무적자는 우리 모두의 처지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슈만의 노래도, 조반니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도 들어보지 못한 독자가 김종삼의 시에 푹 빠져들기는 어렵다. 어쩌면 시인은 그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르고, 그런 젠체하기는 얄팍한 속물근성이라 비판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외롭고 가난했던 시인의 속물근성에는 좋은 의미의 댄디즘(당디슴)이, (부르주아의 반의어로서)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적 귀족주의가 버무려져 있었다.
▲ 술래잡기
심청일 웃겨보자고 시작한 것이
술래잡기였다.
꿈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던 심청인
오랜만에 제 또래의 애들과
뜀박질을 하였다.
붙잡혔다
술래가 되었다.
얼마 후 심청은
눈가리개 헝겊을 맨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술래잡기하던 애들은 안됐다는 듯
심청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