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 반평생을 좌우한다.’
12월1일부터 퇴직연금제 시대가 열린다. 퇴직연금제 도입을 위한 기업이나 근로자의 움직임은 아직 활발하지 않지만, 전문가들은 어떤 유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퇴직 후 노후자금에 큰 차이가 나므로 누구나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월급 450만원 金차장 15년후 퇴직때 DB·DC형 어느 게 유리
▦A사 40세 김모 차장의 경우
올해 40세인 A사의 김모 차장은 지난해 중간정산한 퇴직금을 자녀학자금으로 써 버려 노후를 걱정하던 참이었다. 이런 가운데 최근 회사 노사가 내년부터 퇴직연금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사측이 퇴직금 누진제를 폐지하고 앞으로 매년 말 중간정산을 하겠다고 나서자 이에 반발한 노조가 퇴직연금제 도입을 강력 건의해 이뤄진 것.
그러나 아직 큰 문제가 남아있다. 퇴직연금제의 두 종류인 확정급여형(DB형)과 확정기여형(DC형) 중 어느 게 유리한지 노사는 물론 노조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두 유형의 수익격차와 장ㆍ단점을 15년후 퇴직하는 김 차장 사례를 통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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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월급여 450만원인 김 차장은 15년 뒤 퇴직 시 퇴직연금을 얼마나 받을까? DB형은 퇴직시 총수령액이 미리 정해져 있고, DC형은 운용방식에 따라 수령액이 달라지는 방식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와 근속기간 중 임금인상률, 운용수익률에 따라 퇴직시 연금총액에 큰 차이가 난다.
DB형으로 할 경우 퇴직시 총수령액은 기존의 퇴직금제 방식과 똑같이 ‘퇴직 전 3개월 간 총임금÷3×근속연수’로 계산하면 된다. 이 때 연 평균 임금인상률을 4%(경제성장률 수준)로 가정하면, 김 차장의 15년 뒤 퇴직연금 총액은 1억1,688만원이 된다. 이 경우 김 차장은 적어도 재직 중에는 퇴직연금 운용에 대해 자신이 직접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회사측이 다 알아서 해주고, 혹시 회사가 운용을 잘못해 원금이 까지더라도 노사간에 정해진 퇴직연금 총액만큼은 보장 받기 때문이다.
반면 DC형인 경우 김 차장 스스로 운용 책임을 져야 한다. 최종적으로 받는 연금총액은 임금인상률뿐 아니라 운용수익률에 의해서도 좌우되는데, 회사측은 매년 연봉의 12분의 1을 적립하는 책임밖에 없고 운용은 각 개인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 차장의 운용 테크닉에 따라 퇴직시 연금총액이 입사 동기들과 크게 벌어질 수 있다. 임금인상률이 동일(4%로 가정)한 가운데 김 차장은 국고채에 투자해 연간 운용수익률이 5%에 머무른 반면 다른 동기들은 혼합형 펀드 등에 일부 가입해 3%포인트의 초과 수익을 얻었다면 연금총액은 각각 1억3,134만원과 1억6,660만원으로 3,000여만원이나 차이가 나게 된다. 물론 혼합형펀드에서 손실이 발생해 오히려 다른 동기들의 연금총액이 더 적어지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연평균 임금인상률이 4%에 머무른다는 가정 아래서는 운용수익률이 5%든 8%든 DC형이 DB형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만약 임금인상률이 7%로 높고 DC형 운용수익률이 임금인상률보다 낮은 5%에 머무른다면 오히려 DB형이 DC형보다 많은 금액을 받게 된다. 따라서 임금 인상률이 높은 회사의 경우 DB형이 유리하다.
사실 DC형도 원금손실 가능성은 높지 않다. DC형 운용은 매우 보수적으로 하도록 정부가 제한하고 있어 사실상 원금마저 까먹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DC형의 경우 퇴직연금 운용 사업자는 최소한 3가지 이상의 선택 가능한 운용상품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중 하나 이상은 반드시 원리금 보장상품이어야 한다. DC형은 주식 직접투자 및 주식형ㆍ주식혼합형 펀드에 대한 투자가 금지되며, 채권혼합형 펀드와 기타 수익증권 등 간접투자도 총 투자한도의 40% 이내로 제한된다. 공격적인 운용을 통해 수익률을 높여 보고자 하는 근로자라면 오히려 불만을 느낄 정도로 규제가 강한 셈이다.
이에 반해 DB형은 회사에 운용 책임이 있으므로 주식 직ㆍ간접 투자가 가능하며 근로자 입장에서는 번거롭게 운용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퇴직연금제가 일찍 도입된 선진국에서도 아직까지 DB형과 DC형 중 어느 것이 확실히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지는 않은 상태다. 결국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내 몸에 맞는 유형’을 찾는 수밖에 없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 퇴직연금 Q&A
_모든 사업장이 반드시 퇴직연금제를 도입해야 하나.
“그렇지 않다. 퇴직연금제도 도입은 의무사항이 아니다. 노사 합의에 따라 도입할 수도 있고 기존 퇴직금 제도를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
회사마다 여건에 맞게 도입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다만, 2010년부터 퇴직보험이나 퇴직신탁이 폐지되기 때문에 2010년 이후부터 퇴직금을 사외적립하려면 반드시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_한 사업장에서 기존 퇴직금제와 DC형, DB형 퇴직연금 제도를 동시에 시행할 수 있나.
“가능하다. 퇴직연금제와 퇴직금제를 병행해서 실시할 수도 있고, DC형과 DB형 퇴직연금도 동시에 시행할 수 있다. 근로자가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형태의 제도를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_DC(DB)형으로 가입했다가 중간에 DB(DC)형으로 변경할 수 있나.
“퇴직급여제도의 형태는 일단 결정됐다고 하더라도 근로자 대표와 고용주가 합의하면 변경할 수 있다. 다만 제도를 변경하려면 절차가 복잡하고 전환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최초에 제도를 선택할 때 신중하게 고르는 게 좋다.”
_DB형은 사실상 현재의 퇴직금 제도와 같은 것 아닌가.
“최종 ‘급여’가 ‘확정’돼 있으며 사용자가 연금자산운용의 주체가 된다는 점은 비슷하다. 또한, DB형은 퇴직 시점에 받는 돈이 현행 퇴직금과 비슷한 수준이어서 사용자측의 부담이 퇴직금 제도에 비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퇴직금은 사내유보가 가능한 반면, 퇴직연금은 사외적립을 의무화하고 있고 중간정산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데다가 연금지급이 가능하다. 근로자들이 퇴직 이후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금운용이 훨씬 안정적이라는 의미다.”
_퇴직연금제로 전환할 경우 이전에 발생한 퇴직금은 어떻게 되나.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중간정산 등의 방법을 통해 기존 퇴직금을 일시 지급하고 새롭게 퇴직연금제를 시행하는 방법이 있다.
또, 퇴직연금제를 도입하더라도 기존 퇴직금은 근로자가 실제 퇴직할 때 지급할 수도 있고, 기존 퇴직금 부분까지 포함해 퇴직연금제를 새로 설계할 수 있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면 된다.”
_퇴직급여를 일시금으로 받을 수도 있나.
“퇴직 또는 퇴사시점에 근로자가 연금 또는 일시금 수령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연금으로 받을 경우 일시금으로 받을 때 적용되는 소득세보다 세율이 낮은 연금소득세가 부과된다. 또 연금수급기간 동안 과세가 미뤄져 실질소득이 늘어나는 효과도 있다. 연금으로 받으려면 해당 근로자가 55세 이상으로 가입기간이 10년 이상이어야 한다.”
_퇴직연금제는 담보제공이나 중도인출이 가능한가.
“중도 퇴직해 퇴직금을 일시적으로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중도인출이나 담보제공이 불가능하다. 다만 무주택자가 주택을 구입하거나 가입자 또는 부양가족이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할 때, 천재지변 등 노동부령이 정하는 사유와 요건을 갖춘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가능하다.”
박진석 기자 jseok@hk.co.kr
■ 노사 모두 "실익 안 보여"
대부분의 기업들은 퇴직연금제 도입을 일단 보류한 채 현행 퇴직금제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회사, 노조 모두 현재로서는 큰 실익이 안 보여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영업차원에서 퇴직연금 상품을 판매할 예정인 일부 금융사를 제외하고 일반 제조업체의 경우 노사간 퇴직연금제 도입 문제를 논의하는 곳조차도 찾기 힘든 실정이다.
의무사항도 아닌 만큼 일단 동종업계와 정보교환 등을 통해 추이를 지켜본 뒤 도입이 의무화되는 2010년 이전에 도입 여부를 추후 결정하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다.
쌍용건설 관계자는 “기존 퇴직금제에 비해 근로자들에게 크게 유리할 것도 없는 상황이라 퇴직금제 도입을 위한 노사 협의에서 노조측이 적극적으로 나설지 두고 볼 일”이라며 “의무 사항도 아닌 만큼 당분간은 건설업계의 움직임을 봐가며 나중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SK건설 관계자도 “회사가 퇴직금의 60% 가량을 신탁이나 보험상품에 들어놓아 퇴직금을 떼일 우려가 없기 때문에 직원들이 퇴직연금제 도입에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현재는 다른 회사와 정보교환을 하고 있으며 퇴직연금제 도입과 관련해 직원간 협의도 지속적으로 해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자금 사정이 어려운 중소기업의 경우는 퇴직연금제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다. 수도권에서 사출업을 하는 중소기업 대표 A씨는 “퇴직연금제를 도입하면 다달이 목돈이 필요한데, 기업운용자금도 없어 은행대출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에서 퇴직연금제를 어떻게 도입하겠냐”고 반문했다.
그는 “퇴직연금제가 근로자들의 안정적인 노후 소득을 지원하는 제도인 것은 알지만 현재로선 도입에 따른 아무런 혜택이 없다”며 “회사측에 돌아가는 혜택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대부분의 금융회사들도 퇴직연금제 도입을 주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기네 회사는 퇴직연금제를 도입하지 않으면서 다른 기업들에게 제도 도입을 권유하며 관련상품을 판매하는 게 부담이 돼 ,일부 금융사는 도입을 추진중이다. 한국투신운용은 최근 퇴직연금제 도입을 적극 추진하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미래에셋은 기존 퇴직금제도를 내년초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으로 전환할 계획이며 대신과 CJ투자ㆍ굿모닝신한 등도 내년 DC형 퇴직연금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황양준 기자 naig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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