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이 4년 만에 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읽으며 내가 생각한 건 반(反)전쟁의 평화주의도, 고향을 떠난 자의 비릿한 그리움도, 고대 근동의 찬란하고도 잔인한 문명도 아니다.
나는 그 모든 정서적이고도 정신적인 사념들을 포괄하는 모종의 형식에 더 강하게 공명한다. 허수경의 시는 단순한 언어적 형식을 넘어 정신이 표현되는 갖가지 양태의 감각적 울림들을 통합한 육체적인 감화를 이끌어낸다.
질러 말하자면, 나는 그게 시에서 표현될 수 있는 진정한 음악성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발현되는 건 일차적으로는 언어 율격의 문제이지만, 마음 속 더 깊이 숨은 현들을 건드리는 건 오히려 언어의 이면에서 언어의 한계와 장막을 발가벗기며 드러나는 시인의 질박한 육체이다. 그건 이역만리에서 일면식도 없이 촉수를 자극하는 깊고 둥근 에로스의 표식이다.
허수경은 ‘흩어진 몸의 기름을 짜서/ 만든 초’(‘우리는 촛대’)처럼 자신의 마음을 밝히거나 쓰다듬거나 할퀴는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 찬연하고 질긴 불빛을 우려낸다. 그 보이지 않으나 뚜렷한 불빛은 시인의 몸이 가 닿는 모든 공간과 사물들의 속내를 밝히면서 ‘언어 이전의 둥그런 공명’을 속 깊은 종소리인 양 울려 퍼지게 한다.
죽은 자와 산 자, 고대와 현대와 미래, 고향과 이국 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낯선 바람처럼 스미는 그것은 시인 스스로의 말마따나 ‘눈 먼 사제의 딸’(‘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붉은 국을 좀 보아요’)이 끓여낸 정신의 육수나 진배없다.
몸과 마음을 살풋이 데우며 얼어붙은 정념과 환희와 고통과 눈물을 질박하게 뽑게 하는 영혼의 국물들. 그 뜨뜻미지근하고 구수하면서도 다소 쓰기도 한 시인의 알몸을 들이켜며 나는 또 한 명의 ‘여사제’를 떠올린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록가수 비욕(Bjork)이다.
비욕은 우리에겐 여전히 미지의 가수이다. 아이슬란드라는 미지의 땅 출신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록이나 재즈, 테크노나 발라드 등 모든 음악 장르를 섭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장르에도 명확히 포착되지 않는 음악적 양식은 전 세계를 통틀어 비욕 말고는 그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특출한 개성을 대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욕을 비욕답게 하는 건 요정의 부름 같기도 하고 성난 마녀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그녀의 음색이다.
나는 비욕의 목소리가 여성을 은유할 만한 모든 사물이나 생물의 특징들을 모두 대입해도 틀리지 않는 동시에 그 어떤 비유도 그 불가사의한 목소리를 정확히 표현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시의 궁극을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때문에 비욕의 목소리는, 마치 시의 속성이 그러하듯, 그것을 듣는 사람이 재창조해내어야 하는 특출한 물질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굳이 비유하자면 나는 비욕의 목소리가 허수경이 ‘오 오 그날의 해가 우물 속으로 간 까닭을 아무도 알 수는 없지만,’(‘우물에’)이라고 반복해서 노래할 때의 ‘오 오’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오 오’는 단순한 감탄사지만, ‘그날의 해가 우물 속으로 간 까닭’을 지시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의 언어이다. 또는, 그 까닭을 알더라도 하릴없이 내뱉을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하고도 절박한 언어적 반응이다. 위의 시는 똑 같은 형식으로 반복되며 ‘우물에 뜬’ ‘해’와 ‘달’과 ‘별’ 속으로 ‘다친 아이’와 ‘다친 여자’와 ‘다친 남자’ 들이 차례로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건 비욕이 2001년도 앨범 ‘Vespertine’에서 표현해낸 은밀하고도 스산한 감각적 풍광들을 연상케 한다.
그레고리안 성가의 웅장함과 아리아 풍의 평화로움이 공존하는 그 앨범은 부드러우면서도 날이 선 듯한 현악 연주 위에 얹히는 비욕의 신비스러운 목소리로 현실의 상처를 천상의 어루만짐으로 치유 받고자 하는 영혼의 수난극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천상의 어루만짐은 가식적인 자기위무의 심정에서 꾸며진 예술적 허위가 아니다.
비욕의 목소리는 상처 입은 새끼짐승을 보듬는 대모신의 손길처럼 분명한 체온을 담고 있다. 허수경을 인용하자면 그건 이런 목소리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 종으로 살아온 시간을 아쉬워하며 눈을 뜨고 다시 세계를 보려 하고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이 세계의 마지막인 양 귀를 부실 때
이 지구에 살던 사라진 종들이 사라진 시간을 살아갈 때 그때 다시 무기를 들어 타인의 눈을 겨냥하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도 나무 흔들리는 소리,
오 그 소리, 일월성신이 인간이라는 종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소리
- ‘나무 흔들리는 소리’ 부분
시집 서두에서 허수경은 ‘내가 특별히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건 아니’라는 전제를 두며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을 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 모든 풍경에 대한 노래들을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丹?繭箚?고백한다. 그의 말마따나 이 시집은 머나 먼 이국에서 14년 동안 고고학을 공부하며 접하게 된 인류의 부장물들에 시인의 체온을 덧대어 탄생한 엄밀한 육체의 현현으로 읽힌다.
그래서 읽혀지기 전에 만져지고, 듣기 전에 공명이 생기며, 느끼고 생각하여 울기도 전에 마음속부터 축축이 젖게 만든다. 시인은 평화를 생각하기 이전에 지고한 평화의 풍경을 육체 속에 담고 있었으며 전쟁의 극악함이 피 바람을 일으키는 걸 직접 목격하지 않고도 기원부터 흠집이 나 있는 인간 영혼의 불가피한 비대칭성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집은 책장을 다 덮고 난 뒤에도 인류의 유물과 인간의 심성과 오래 이격된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인 거리가 한데 엉켜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나는 그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한 시인의 진정한 물질적인 본연이라 생각한다. 씌어져 고착된 시는 다만 이 모든 울림들의 홀씨로 떠돌 뿐이다.
정말 좋은 시집은 이처럼 시를 안에다 가두지 않고 바깥을 떠돌게 한다. 떠돌면서 쉼 없이 순환하는 시간의 한 지점을 영원한 자기 것으로 새김으로써 비로소 ‘일월성신이 인간이라는 종의 몸속으로 들어’와 ‘소리’를 내게끔 한다. 그 ‘소리’는, 적어도 나라는 한 인간의 편협한 체험의 스펙트럼 안에서 비욕의 목소리와 겹친다.
내게 허수경과 비욕은 이질적인 언어와 물적 토양을 뛰어넘어(또는, 그것들을 동시에 끌어안은 채) 생명의 빛과 그늘을 통찰하는 이 시대의 모신(母神)을 표상한다.
근동의 사막을 헤집으며 영혼의 씨앗과 잔해를 더듬는 한 동양 여성과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극지에서 외계인의 발성을 토해내는 한 서양 여성이 만나는 건 전혀 생뚱맞은 일이 아니다.
시집 뒤표지에 허수경이 ‘뒤로 가나 앞으로 가나 우리들 모두는 둥근 공처럼 생긴 별에 산다. 만난다, 어디에선가.’라고 쓰고 있듯, 그네들은 어느 한 저녁의 바람과 어느 한 새벽의 별빛들처럼 불현듯 뒤엉켜 극동의 한 골방에서 맹목의 열정으로 절치부심하는 한 남자의 삭은 감각을 자애로운 자매처럼 일깨운다.
‘별을 사막에서 바라보면 별을 사막의 바람이 자고난 뒤 바라보면 사실 별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고 별이 우리를 가지고 있지만’(‘별을 별이’) 이라고 허수경이 모국어의 리듬을 분방하게 풀어헤칠 때 비욕은 특유의 새되고 여린 음성으로 ‘밤에 피어오르는 것들’(앨범 타이틀 ‘Vespertine’은 ‘Things flourishing in the evening'이란 뜻이다)의 전모를 새하얀 백조의 날개로 펼쳐 보인다.
그 양 갈래로 확장하는 어둠과 빛의 극명한 조화는 ‘불을 노래하는 적막의 북처럼’(‘우물에’) 현재를 지나 과거를 뛰어넘고 미래를 다그쳐 이 짧은 합일의 순간을 영원 속으로 길게 뻗치게 한다.
그 영원으로 가는 긴 통로에서 허수경은 인류의 시원 깊숙이 감춰진 ‘우물’을 길러 ‘붉은 국’을 끓이고, 비욕은 순결한 백조의 육체를 제 몸에 받아들여 새로운 종의 울음을 토해낸다.
그리하여 풀 먹인 빨래를 곧게 펴는 조선여인의 방망이질 소리 같기도 하고 탄생과 죽음 사이를 오고가는 북미 원주민의 제의 소리 같기도 한 ‘적막의 북’이 문득 나의 심장 속에서 만져질 때 나는 기어이 그녀들의 순한 새끼로 거듭 나며 오래 참았던 첫 울음을 운다.
오랜 ‘시간언덕’을 거슬러 온 이 육체는 오래도록 ‘나, 라는 이명의 이름’(‘웃는 소리’)으로 ‘먼 나라’의 ‘눈’으로 흩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들의 노래가 만방의 허공에서 수시로 합일하듯, 지금의 ‘나’들도 도처에 휘날리고 있다. 도처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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