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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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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입력
2005.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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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28일 오후 4시께 중국 상하이 둥허양행 호텔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홍종우가 호텔에 함께 머물던 김옥균을 쏜 것이다. 홍종우가 김옥균의 일본 친구들에게 요리를 대접하는 등 둘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렇다면 홍종우는 왜 상하이로 김옥균을 꼬여내 총을 쏘았을까.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풍운아 김옥균의 암살 사건을 매개로 구한말 시대상과, 각 세력의 역학관계를 짚어보는 대중 역사서이다. 저자는 한국근대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서 일하고 있다.

홍종우는 경찰에 잡혀간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선의 관원이고 김옥균은 나라의 역적이다. 김옥균의 생존은 동양 삼국의 평화를 깨뜨릴 우려가 있다.” 이 말대로라면 그는 어명을 받든 공무를 한 것이고, 일본에 기대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근대화 추진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홍종우를 수구적 인물로 각인시켰고 그 같은 평가는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홍종우의 행적을 보면 그가 개혁과 외국 문물을 거부하는 고집 센 폐쇄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1890년 서른 여덟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현지의 저명 인사와 교류,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접했다. 개화사상에 있어서는 홍종우가 김옥균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홍종우는 그곳에서도 조선의 전통과 군주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다. 춘향전, 심청전을 번역하고 한복을 입고 다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무튼 조선 왕실은 김옥균의 죽음을 경사로 받아들였다. 홍종우가 귀국하자 고종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홍종우는 스타가 됐고 단번에 실력파 관료로 부상한다.

고종을 보좌, 대한제국의 선포에 기여하고 개혁을 주도한다. 길영수, 이기동이 개혁을 함께 이끌었는데, 사람들은 이들이 큰 활약을 했다 해서 이름 중 한 글자씩을 따 ‘홍길동’으로 불렀다.

홍종우는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하의원을 설치, 백성이 자신의 뜻을 전할 대의원을 직접 뽑도록 하자고 했다. 외국 돈의 무분별한 유통을 막고 대한제국 연호의 화폐를 유통해야 한다고도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오래 가지 못했다. 대한제국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압력이 거세지고 개화론자가 득세하면서 홍종우 일파는 점차 도태됐다. 사실 일본은 김옥균의 죽음을 조선과 중국 침략의 빌미로 사용했다. 일본은 김옥균이 귀화만 하지 않았지 일본인이나 다름없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국내적으로는 개화의 ‘개’자도 꺼낼 수 없는 경직된 정치구조가 정착했다.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루겠다던 홍종우의 생각은 그가 품었던 계획과 다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둘이 꿈꾼 미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목표에 도달하는 구체적 방안이 달랐을 뿐이다.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전인류의 공존을 꿈꾼 김옥균은 일본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현실적 수단으로 그들의 힘에 의지했고, 홍종우는 조선이 중심이 되는 주체적 근대화에 매달렸지만 제국주의 질서가 판치는 시대에 현실적 대안을 찾지 못했다.

둘이 상생의 길을 찾았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수 있다. 생각이 다르다고 대립하고 총부리를 겨눌 때, 역사는 우리에게 큰 고난을 안겨준다는 게 이 사건의 또 다른 교훈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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