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시험이 끝나니까 홀가분하기도 하고 조금은 허탈하기도 하네요. 이제 그동안 못했던 것들 마음껏 해 봐야지요. 앞으로 기말고사도 보고 논술과 면접준비도 해야겠지만 지금 이순간은 너무 행복합니다. 인생에서 아무 생각 없이 놀 수 있는 시간은 지금밖에 없잖아요. 우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홀가분한 사람들이지요. 하하하~.”
매년 11월의 어느 하루. 대한민국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없다. 고 3생과 재수생 등 당사자는 물론이고, 교사와 학부모, 공무원까지 총동원돼 무한 입시전쟁의 최후 전투를 치른다.
엊그제 이 전투를 끝낸 김한준(17ㆍ경복고)군, 김송이(18ㆍ수도여고)양, 양슬기(18ㆍ경기여고)양, 최석영(18ㆍ명지고)군, 이렇게 네 학생이 25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사 11층 편집국에서 만나 시험을 마친 느낌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김한준군이 “수능 시험 끝나니까 어떻느냐?”는 질문에 “시험 시간이 너무 길어 지겨웠다”고 말문을 열었다. “날아갈 것 같다”는 식의 답변을 생각했던 참석자들은 “지겹다”는 말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최석영군은 “‘70시간 수면’을 목표로 세워놓고 그동안 못잔 잠을 실컷 자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1차 수시모집에 합격해 유일하게 수능을 보지 않은 김송이양이 “혼자 노는 것이 미안해 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친구들의 합격을 기원했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친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부럽기도 하겠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사장 앞에서 단짝 친구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막상 친구를 보니 감정에 북받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김한준군은 수능 다음날인 24일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친구 형들 학생증을 빌려서 넷이서 명동 맥주집에 갔어요. 모두 6,000cc를 마셨지요. 끝나고 과외를 하는 오피스텔에 가서 맥주와 소주를 사다 먹었어요. 레몬향이 나는 맥주 KGB 보드카가 특히 맛이 순하고 좋아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습니다. 그런데 남자들만 있어서 좀 아쉽더군요. 엄마한테 혼날지 모르니까 이런 얘기는 신문에는 내지 말아주세요.”
갈색 뿔테 안경이 인상적인 양슬기양이 “수능을 보고 나서 그냥 잠자기가 시간이 너무 아까워 친구 10명과 서빙고동 온누리교회로 예배를 보러 갔습니다”라고 하자 옆에 있던 김군이 “바른생활 소녀네~”라며 놀려댔다.
김송이양은 수능 시험이 끝난 오후 6시 15분 바로 수험장을 나서 친구들과 함께 튀김, 군밤, 닭꼬치, 순대볶음 등 온갖 길거리 음식을 먹었다고 자랑했다. 좌중의 시선이 쏠리자 최석영군은 “저는 특별히 한 것이 없는데 어쩌지요”라며 “죄송합니다”는 말만 연신 반복했다.
이들이 전하는 고 3생들의 요즘 풍경은 이렇다.
여학생들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로 여드름이나 뾰루지가 많이 나 피부 관리를 받으러 병원으로 몰려가고 있다고 한다. 일부 학생들은 그동안 절약한 용돈으로 인도네시아 발리 등으로 외국 여행을 갈 계획이다. 경락마사지, 전신마사지를 받는 학생들도 있다.
최석영군은 “초등학생 때 3~4년 동안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한번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어요. 록 공연도 보러가고 싶고요”라고 말했다.
합격 발표 때까지 마냥 놀기만 해도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생마다 처지가 다르다.
우선 대학 합격을 확정지은 김송이양 같은 경우는 무조건 홀가분하다.
반면 김한준군과 최석영군에게는 면접이란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다. 12월 19일 수능 성적표가 발표되면 원하는 대학에 지망할 때까지 면접 준비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김군은 “대입에 실패해도 재수는 절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차라리 유학 갈 거예요. 아무리 재수가 필수가 된 상황이라지만 재수해서 성공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거든요. 일단 떨어진다는 생각은 안 하려고요.”
최군은 재수를 해야 할 상황이 닥친다면 “어찌할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이들의 이야기는 교육 현실에 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김한준군은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것이 결정 나는 것이 정말 싫어요”라고 말했다. 김송이양은 제법 어른스러운 견해를 제시했다.
“제일 큰 문제는 대학 진학 위주로만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사회를 둘러보니 실제로 공부 많이 한 사람만 필요한 것이 아니더군요.
올바른 가치관 교육 없이 지식을 주입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싫습니다. 개성을 살리고 도덕심을 높이는 교육이 안 돼서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최석영군은 또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무엇이 죄송한지 모르겠지만.
좌담을 마친 후 양슬기양은 인사동 전통거리를 보러 떠났다. 김한준군은 다시 술 약속이 있다며 평창동으로 향했다. 김송이양은 친구들?놀러간다며 롯데월드로 갔고, 최석영군은 다시 “죄송하다”며 홍은동 집에서 잠을 자겠다고 떠났다.
■ 수능 '전투' 끝낸 고3 4人 프로필
김송이 수도여고 3년ㆍ문과- "난 이미 수시에 합격. 순으 끝낸 친구 보니 와락 눈물이 쏟아져"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이다. 2녀 중 장녀. 고교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 1차 수시모집 리더십 특별 전형으로 성균관대 사회과학계열에 합격한 상태라 남들보다 느긋하다.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스타일답게 생활신조는 '하면 된다.' 별명은'다이너 송.' 다이너소어(공룡)를 닮은 송이라는 뜻에서 친구들이 붙여줬다.
김한준 경복고 3년ㆍ문과- "수능 한번으로 결판 교육제도 정말 싫어. 재수는 절대 안할 것"
1988년 전북 남원 출생. 2남 중 장남이다. 아버지(의류업), 어머니(제화업) 모두 사업을 하는 관계로 어려서부터 또래보다 자립심이 강한 게 장점이라고 자처한다.
경영학을 전공해 훗날 세계를 상대로 무역업을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작년 전교회장 선거에서 아깝게 낙선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라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한 스킨 스쿠버 실력이 수준급.
양슬기 경기여고 3년ㆍ문과- "잠만 자기 아까워 교회 예배에 갔죠. 인사동 구경할래요."
1987년 경남 진주 출생. 아버지는 사업을 하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이다. 2녀 중 장녀. 이번에 2차 수시모집 연세대 인문학부에 합격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 고 2때 청소년 관련 방송 프로그램의 비디오자키로 활동하기도 했다.
심리상담원을 꿈꾸고 있다. 배우 이은주의 자살을 계기로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긍정적인 사고와 만족하는 삶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긴다.
최석영 명지고 3년ㆍ이과- "초등학교 때 배웠던 피아노 배우고 싶어… 재수는 글쎄"
1987년 서울에서 났다. 회사원인 아버지와 중학교 수학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독자로 자랐다. 내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관심 분야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과에서도 항상 톱 3 안에 드는 수재형으로 물리학과에 진학해 한국을 대표하는 물리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요즘 학생으로는 드물게 휴대전화가 없다.
"공부에 방해도 되고 필요할 때는 어머니 휴대전화를 쓰면 되기 때문"이라는 게 최군의 변이다.
박상진 기자 okome@hk.co.kr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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