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은 흐렸고, 중국과 러시아는 맑았다. 19일 폐막한 APEC에 참석했던 주요 정상들의 표정이자 대체적인 성적표다.
부시 미 대통령에 대한 미 언론의 평점은 야박하다. 워싱턴 포스트는 “APEC 이슈들이 미국 내 이라크전 공방전 등으로 주요 뉴스가 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부시의 부산 행보가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17일 한미 정상회담 직후 윤광웅 국방부장관이 자이툰 부대 병력의 감축 방침을 밝히자 미 언론은 ‘부시 대통령이 한국에 한방 먹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부시는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 타결을 촉구하는 특별성명 작성을 주도, 강력한 보조금 정책을 펴는 유럽연합(EU)에 타격을 가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표정은 더 어두웠던 것 같다. 고이즈미 총리가 정상회의 폐막 직후 부랴부랴 부산 롯데호텔에서 자청해 가진 기자회견은 아시아로부터 따돌림당하고, 일본 언론으로부터 ‘아시아 외교 실패’라는 비판을 받는 처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회견에서 “나는 일한, 일중 관계의 우호론자”라고 강조했다. 정상회의 기간 내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외면당하고 한국과도 껄끄러운 관계가 지속되는 데 대한 나름의 수습이었다.
특히 18일 한일 정상회담 직후 일본측이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다”고 브리핑을 했다가 한국이 이를 부인하는 일도 생겼다.
고이즈미 총리가 무역자유화를 논의하는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한국, 중남미 국가들과 문제가 없다”고 다소 생뚱한 정치적 발언을 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반면 후진타오 주석에 대한 평점은 매우 후하다. 한국으로부터 시장경제국 지위를 얻었고 남미 국가와는 처음으로 칠레와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했다.
중국 언론은 후 주석이 가장 각광받은 정상 중의 한 명이었다고 소개하면서 중국이 세계 주요 경제포럼의 지도적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조용히 실속을 챙겼다. 내년 중 WTO 가입을 추진 중인 러시아는 이번에 APEC 회원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냈다.
내년 APEC 정상회의 개최국인 베트남 역시 APEC 회원국으로부터 WTO 가입 지지 입장을 확약받았고, 쩐 득 르엉 국가주석의 활발한 양자 정상회담을 통해 차기 회담의 여건을 조성했다.
부산=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 뒷 이야기
정상들이 묵었던 해운대 특급호텔에서 여러가지 뒷얘기들이 무성하다. 18일 제1차 정상회의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마이클 소마레 파푸아 뉴기니 총리는 옷에 달린 금장 단추 하나가 떨어졌다며 호텔측에 급히 SOS를 요청했다.
호텔 직원이 객실로 올라갔으나 떨어진 단추는 찾을 수 없었고 여분의 단추도 새 것이라서 나머지 단추들에 비해 반짝거려 어울리지 않았다. 호텔측은 여분의 단추를 사포로 문지르고 약품을 처리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여전히 색깔이 바랜 다른 단추들과 비슷한 색을 내기 힘들었다.
호텔측은 고심 끝에 가지고 있던 모든 종류의 단추를 갖고 올라가 옷에 대어 보고 제일 어울리는 것을 선택해 모든 단추를 교체했다. 소마레 총리는 “원더풀” “탱큐” 를 연발했다고 한다.
쩐 득 렁 베트남 주석과 압둘라 바다위 말레이시아 총리는 한국 라면을 좋아해 룸서비스로 라면을 주문했고 호텔측은 천연 양념으로 국물 맛을 낸 특별 라면을 제공했다.
리카르도 라고스 칠레 대통령은 호텔 내 이탈리아 식당을 찾았다가 18일 열린 정상만찬에 사용된 칠레산 몬테스 와인이 판촉 행사의 일환으로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직접 이 와인을 주문했다.
건강식을 좋아하는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을 위해 호텔측은 직접 만든 무설탕 쿠키류와 샌드위치 등을 제공했고 아로요 대통령은 호텔을 떠날 때 자신을 돌본 직원들에게 일일이 향수를 선물해 여성 정상의 섬세함을 보였다고 한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도착한 다음날인 17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1시간 동안 자전거 하이킹을 즐긴 것으로 확인됐다. 그가 자전거를 탄 장소는 뜻밖에도 미군 부대가 아닌 국군 부대였다.
당초 물 샐 틈 없는 통제가 이뤄지고 있던 누리마루 하우스 순환도로와 국군 부대 2개 안이 검토됐으나 미국측은 한국측이 추천한 국군 부대를 둘러본 뒤 승락했다. 그가 자전거를 탄 부대는 해운대에서 10분 가량 떨어진 부산 외곽 군부대였다.
APEC 회원국 정상 가운데 부산에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은 여성인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였다. 각국 정상의 정상회의장 도착 및 영접은 18일 오후 1시 25분부터였으나 클라크 총리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전 11시 25분.
클라크 총리는 당초 국내선으로 부산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제1차 정상회의에도 지각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경호안전통제단은 즉시 인천공항에 대기 중이던 공군 수송기를 활용키로 결정, 클라크 총리는 12시 1분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하지만 통상 민간인 항로를 이용할 경우 비행시간만 55분이 걸리므로 공군이 부산까지 일직선으로 운항할 수 있는 항로를 열어 주었고 클라크 총리는 40분 만에 부산에 도착, 지각을 면했다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모두 참석하는 행사에는 사전에 입장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18일 벡스코에서의 1차 정상회의 때는 알파벳 순, 그날 공식만찬 때는 알파벳 중간인 ‘N’ (뉴질랜드)부터, 19일 2차 정상회의 때는 알파벳 역순으로 각각 도착하기로 사전에 조율이 돼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순서가 몇번 바뀌었는데 순서를 지키려다 행사가 지연되는 일을 막기 위해 경호안전통제단이 그때 그때 적절하게 순서를 조절했다고 한다.
폐막을 앞두고 누리마루 하우스 옆에서 찍은 기념사진도 사전에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상 중 가장 키가 작은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아로요 대통령은 당초 뒷줄에 배정됐으나 앞줄의 폴 마틴 캐나다 총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바꾸었다.
뉴질랜드 총리, 겨우 지각 면해
APEC 회원국 정상 가운데 부산에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은 여성인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였다. 클라크 총리는 당초 국내선으로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지각할 것이 뻔해지자 정부는 즉시 인천공항에 대기 중이던 공군 수송기에 그를 태웠다.
그럼에도 통상 민간 항로를 이용할 경우 비행시간이 많이 걸리게 돼 공군이 부산까지 일직선으로 운항할 수 있는 항로를 열어 주었고 클라크 총리는 지각을 면했다
부산=특별취재단
■ 베스트&워스트
건국 이래 최대 외교행사라는 APEC 행사의 베스트(best)와 워스트(worst)를 꼽는다면? 한국일보 특별취재단이 나름대로 선정해 보았다.
각국 귀빈과 취재진의 눈길을 사로잡은 베스트는 단연 광안대교였다. 광안대교는 16일 오후 8시 30분부터 한 시간 가량 진행된 불꽃놀이와,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 선언’ 발표장 배경이 되며 부산 APEC의 추억을 참가자들의 마음 깊이 새겼다. 그러나 불꽃놀이는 100만명의 대이동을 유발해 교통통제가 뒤엉켜 난장판이 되고 만 ‘워스트’도 되고 말았다.
심지어 광안리 해수욕장서 축사를 한 반기문 외교부장관과 외국의 일부 각료급 귀빈들은 해운대 숙소까지 2시간 반 가량이나 차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벡스코 국제미디어센터(IMC)도 ‘베스트’와 ‘워스트’가 뒤섞인 평가를 받았다. 공동 브리핑룸에는 400여 개의 초고속 인터넷 선과 시내 전화가 무료로 제공돼 “역시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내ㆍ외신 기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외교통상부(총괄), 부산시(총괄), 산업자원부(투자환경설명회), 전국경제인연합회(CEO 서밋) 등으로 나누어 진행된 행사를 일괄적으로 취합하는 언론 창구가 없어 취재에 큰 혼선을 빚었다.
IT 특별 전시관에 선보인 아인슈타인의 얼굴의 휴먼 로봇‘알베르트 휴보’도 베스트였다. 사람처럼 걷고 움직이는 것은 물론 다양한 표정으로 감정까지 표현하는 이 로봇에 대한 외국 정상과 부인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각국 정상의 에스코트 역시 완벽에 가까운 타이밍을 연출하며 감탄을 자아냈다. 해운대구의 5개 호텔에서 출발했지만 의전용 차량들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정상회의장에 정확히 1분 간격으로 도착했다.
일부 정상은 순서가 바뀌기도 했지만 정상을 영접하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다른 나라 정상들이 기다리지 않기 위해 수십 차례 모의훈련을 한 결과다.
또 90%가 훨씬 넘은 부산시민의 2부제 준수율도 베스트로 꼽을 수 있다.
거물급 재계 인사들이 일반 객실에 묵어야 했고, 외국인 신청자가 너무 적어 투어 코스를 한번도 운행하지 못하는 등 관광 및 숙박 인프라가 부족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또 낡은 건물이 모인 곳을‘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임시벽으로 가린 전시행정도 부산 서민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중 하나다.
부산=특별취재단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 CEO서밋 참석 외국 기업인들 "골프보단 일"
APEC의 주요 행사인 CEO 서밋에 참여한 세계적 기업인들은 휴식 대신 일을 택했다.
19일 부산에서는 CEO 서밋의 마지막 행사로 APEC기업인 친선골프대회가 예정돼 있었다. 전경련과 부산 상공계는 이를 통해 외국 기업과의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서밋 참가 기업인들은 골프보다는 서울 지사 방문이나, 부산 산업시찰 등 내실 있는 일정을 택했다. 결국 골프대회에는 서밋 의장인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강신호 전경련회장 등 국내 기업인들과 9명의 외국인 CEO만이 참여한 반쪽 행사가 됐다.
반면 산업시찰에는 45명의 외국인 CEO가 참석했다. 이들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벡스코의 IT전시관, 부산ㆍ진해 경제자유구역청, 르노삼성자동차 공장, 부산 신항 및 컨테이너 부두 등을 돌아보며 부산의 투자환경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안내를 맡은 전경련 관계자는 “CEO들은 특히 부산 신항과 컨테이너 부두를 보면서 한국의 항만시설과 물류역량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고 전했다. 이 행사에는 루이스 베가 페루 무역협회장과 러시아 파워머신사 블라디미르 회장 등이 참여했다.
씨티그룹, DHL, 마이크로소프트, 게일인터내셔널 등 국내에 자회사를 두고 있는 기업의 CEO들은 지사 방문에 나섰다. 윌리엄 로즈 씨티그룹 수석부회장, DHL 프랭크 아펠 대표, 게일인터내셔널 존 하인즈 사장, 마이크로소프트의 크레그 먼디 부사장 등은 18일 서밋의 공식 일정이 끝나자마자 서울 지사를 찾아 사업 보고를 듣거나 직원들을 격려했다.
이번 APEC은 외국의 유수한 기업인들의 방문으로 큰 투자 효과를 거뒀다. 행사기간 동안 투자환경설명회를 개최한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산자부와 부산시, 인천경제자유구역청, KOTRA 등은 12개 기업 대표와 5억 600만 달러 규모의 투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또 세계적 전자상거래업체 이베이는 서울에 아시아ㆍ태평양지역 경영총괄본부를 두기로 합의했으며, 해외거점 무역관에서는 300여명의 해외투자가와 2억 2,000만 달러 상당의 투자상담이 이루어졌다.
산자부는 20일 정부과천청사에서 ‘APEC 경제부문 주요성과’ 에 대한 브리핑을 갖고, 투자환경설명회와 CEO 서밋 등에서 제기된 규제완화 등 투자환경 개선 문제에 대해 범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후속조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부산=특별취재본부 신재연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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