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건, 임동원 두 전직국정원장의 구속에 대해 마침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16일 민주당 한화갑 대표 등과의 면담에서 “(현 정권이) 지금 무리한 일을 하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만들고 있다”고 말해 검찰의 기소내용을 원천 부정했다.
현 정권과 검찰에 대해 품고 있는 노기(怒氣)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발언이자, 향후 정권과 김 전 대통령측 관계가 가파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김 전 대통령은 “내 마누라는 속일 수 있어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눈은 속일 수 없다”며 “반드시 이번 일의 흑백이 가려질 것이며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도 했다.
호남 등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현 정권과의 전면전 선언이나 다름없는 그의 발언은 일파만파의 정치적 파장을 부를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입지가 불안해진 우리당의 호남 출신이나 일부 수도권 의원부터 동요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이미 두 전직 국정원장에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검찰 을 비판하는 등 최근 상황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들끓기 시작한 호남여론에 밀려 노무현 대통령에까지 각을 세우려 할 경우 우리당은 또 한번 친노(親盧)와 비노(非盧) 세력간 충돌이 벌어질 전망이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김 전 대통령의 대응은 민주주의와 인권옹호의 수호자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그의 도덕성이 도청파문으로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한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도 있고 별일 다 있다. 그런 세상을 살아왔다”는 자조적 표현으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극도의 배신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김 전 대통령과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이후 정치적 상황이 얽히면서 두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악연으로 점철됐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을 불과 열흘 앞두고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는 등 읍소했지만, 석 달 뒤 노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법을 수용해 김 전 대통령을 궁지로 몰았다. 그 해 11월에는 김 전 대통령이 만든 민주당이 분당되면서 우리당이 창당됐다.
그러나 도청파문의 충격파는 이들 두 사건과 차원이 다르다. 대북송금만 해도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국익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호소할 수 있었다. 반면 도청파문은 그가 평생 살아온 삶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건이다.
이번 일로 양측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신 건강만 좋았으면 정권 타도운동에라도 나서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북송금 특검 발표 직후인 2003년 8월 김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첫 강연에서 맹자를 인용하며 ‘임금이 선정을 하지않고 백성을 괴롭히면 임금을 추방할 권리가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보라”며 “지금 심경은 그때에 비할 게 아니다”고 전했다.
이동국 기자 eas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