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죽은 어린이를 놓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묻는 것은 피하고 싶은 일이다. 가장 약한 자를 떠받칠 수 있도록 사회의 안전망을 촘촘히 하지 않은 책임은 내게도 있다.
이혼한 부모로부터 버려져서 외갓집으로 보내졌지만 외조부모는 농사일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실정이라서 혼자 살다가 개에 물려 세상을 떠난 아홉살 소년은 그러나 책임을 묻게 한다. 가장 큰 책임은 무책임한 가족에게 있겠으나 과연 사회는 할 일을 했나.
●초등생 죽음, 사회 안전망에 허점
아동학대예방센터와 가정위탁지원센터라는 안전망을 만들었으나 지방자치단체에 실행업무는 이관해서 책임이 없다는 보건복지부에도 묻고, 혼자 몸으로 그 지역의 생활보호대상자들을 모두 건사하느라 파김치가 된 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복지사에게도 책임을 묻게 하고, 동사무소에는 연락을 했지만 아동학대예방센터에는 미처 연결을 못 시킨 학교에도 책임을 묻게 만든다.
아이를 버려둘 마음은 없었겠으나 끝내는 버리고만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연결고리가 헐거워 그 어린 것은 죽었으며 또 다른 수많은 어린이들이 비슷한 처지에서 버려지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처참한 죽음이 헛된 것이 되기에 이 약한 소년의 죽음을 빌어 도대체 우리 사회의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그것은 1998년 친아버지와 계모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고 다리미에 지져지고 먹지조차 못해 죽음 직전에 발견된 영훈이라는 소년과 2000년 종교적 이유로 병든 딸에게 치료를 거부한 어머니 때문에 사경을 헤매는 시내라는 소녀 덕분에 학대하는 부모로부터 아동을 떼낼 수 있도록 비로소 아동복지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약한 자의 참혹한 희생에 의해서만 복지문제에서 한 단계 나아가는 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고쳐지지 않는 한 이런 과정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새 어린이들끼리 있다가 형제가 불에 타서 숨진 것이 10월이다. 한 달 새에 방임으로 인한 아동 사망사건이 또 터졌다. 더구나 11월은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건복지부가 ‘희망의 전화’(129)를 개통한 달이다. 만일 이 전화나 아동학대예방센터 전화(1391)에만 누군가 소년을 연결해주었어도 그는 살았을 것이다.
어린이가 장시간 어른의 보호 없이 혼자 지낸다는 것은 아동학대라는 인식을 이웃들만 갖고 있었어도 아이는 살았을 것이다. 이웃이 직접 거둬 먹일 형편이 못 된다면 어린이는 위탁가정을 찾거나 아동학대예방센터의 그룹홈으로 갈 수 있었다. 어린이답게 돌봄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이웃이 없었다. 교사는 그 전화를 몰랐다. 동사무소의 공무원은 직접 해결하려다가 시간을 놓쳤다. 무엇보다 사회복지인력이 부족하다. 학대받는 아동을 위한 구조체계가 성기다. 가정위탁지원센터는 16개 시도에 1개씩 있고 아동학대예방센터는 전국에 39개가 고작이다.
●누구든 신고하는 강제규정 둬야
교사나 의사나 해당 공무원 같은 신고의무자들이 신고를 하지 않아도 강제규정이 없다. 프랑스는 모든 시민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을 형법으로 규정했다.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조해 준다고 자기가 위험에 빠지지 않는데도 구해주지 않으면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360 프랑 이상 1만5,000 프랑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번 사건이 벌어진 의왕시는 공교롭게도 98년 영훈이가 살았던 곳이다. 처벌이 없었기에 이 도시는 98년 사건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보건복지부의 요즘 최대 과제는 출산율 높이기 인듯하다. 한 가정이 두 자녀를 갖도록 조 단위대 돈을 쏟아 붓겠다고 한다. 아서라. 여자는 아이 낳는 공장이 아니다. 아이를 낳게 하는데 애쓰지 말고 태어난 어린이들이나 잘 지켜라.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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