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 ‘군대 생활 잘 하면 사회 생활 잘 한다’는 통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 군대란 대부분의 남자들이 사회가 인정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지독한 성장통이다.
쉴새 없이 이어지는 집합과 얼차려와 구타를 견뎌내며 ‘20대 소년’은 고참이라는 어른이 된다. 그 사이 소년은 복종과 비굴함의 효용성을 깨닫게 되고, 상급자로서 하급자를 어떻게 조이고 풀어야 될지까지 배워 간다.
결코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없는 군대 생활은 제대 뒤 추억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로 포장된 채 과거 속에 묻히기 일쑤다. 누구에게나 정신적 상처를 안겨주는 2년 여의 시간은 아주 가끔 술자리에서, 추억의 단편을 끄집어 낼 때나 천편일률적인 고생담이나 무용담으로 변질되어 등장할 뿐이다.
올해 부산영화제 최대 화제작인 ‘용서 받지 못한 자’는 너무나 보편적이지만, 제대로 영화화 되지 못했던 군대 내무반 생활에 초점을 맞춘다. 입대 후에는 맞고 구르며 피해자로 살다가 제대를 앞둘수록 때리고 굴리는 가해자로 변해야만 했던 의무 복무자의 감추고 싶던 가혹한 운명을 들춰낸다.
영화는 이런 부조리가 단순히 군대 생활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남성들의 실체를 형성하는 주요 뼈대임을 드러내고, 나아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권력 관계까지 통찰한다.
막 입대한 승영(서장원)은 군대에 적응하지 못 한다. 장교의 전투화에 왜 ‘물광’까지 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고, 고참들의 불합리한 명령에는 두 눈 부릅뜨고 맞선다.
중학교 동창이자 말년 병장인 태정(하정우)이 이런 승영을 감싸주지만 한계가 있다. 승영이 눈엣가시이기만 했던 다른 고참들은 태정이 제대하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린다.
잘못된 군대 문화를 바로잡겠다고 호언하던 승영은 태정이 제대하자 마자 살아 남기 위해 자신이 먼저 변한다. 그 동안 몰랐지만 태정이 그를 받쳐 주던 든든한 권력이었고, 그 권력의 공백을 다른 고참들이 메우게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승영은 고참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 새 전투화와 군복을 바치고, 연신 굽신거린다.
그러던 중 그가 세심히 보살펴 오던 고문관 지훈(윤종빈)이 안락한 군 생활을 방해하는 존재로만 느껴진다. 외톨이가 된 지훈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거두고, 죄의식에 시달린 승영은 휴가 때 태정을 찾아가 자기가 좋은 고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 받으려 한다.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사병의 일상을 담아내지만, 군대를 다녀온(아니면 가야 할) 남자, 혹은 군대에서 축구 경기 하던 이야기라면 손사래를 치는 여자가 함께 공감할 수 있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승영이 태정을 귀찮게 따라 붙는 하룻밤 사이로 과거의 기억들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극은 미스터리 형식을 띄며 긴장감을 유발한다.
유일한 비밀 공간인 화장실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고, 고참의 성희롱까지 감내하며 정글의 규칙을 하나 둘 배워가는 군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에서 관객은 권력의 생리를 직시하게 된다. 권력이란 필연적으로 경직된 위계 질서와 직결, 소소한 인간 관계까지 참견한다는 점을 영화는 주장하고 있다.
6㎜ 디지털 캠코더로 담은 이 2시간짜리 영상물은 올해 중앙대 영화과를 졸업한 윤종빈(26) 감독의 작품이다. 제작비는 고작 2,000만원. 휴학중의 입대 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품으로 연결시킨 윤 감독에 대해 영화계는 “올해 한국 영화계가 발견한 놀라운 재목”이라며 반기고 있다.
부산영화제에서 PSB관객상, 뉴커런츠 특별 언급상, 국제 영화 평론가 협회상, 넷팩상 등을 휩쓴 이 작품은 베를린 영화제와 선댄스 영화제의 초청을 받아둔 상태다.
"허위로 내무반 촬영허가" 軍, 윤종빈감독 고소키로
한편 육군본부는 16일 “영화와는 다른 내용의 시나리오를 제출해 부대 내무반 촬영 허가를 얻었다”며 윤 감독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혐의로 고소할 뜻을 밝혔다. 윤 감독은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다”며 혐의를 인정했다. 18일 개봉. 15세.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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