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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9) 돌이키고 싶은 영화 '돌이킬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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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9) 돌이키고 싶은 영화 '돌이킬 수 없는

입력
2005.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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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다소간의 뜬금없음을 무릅쓰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인터넷으로 철 지난 영화들을 다운 받아 보는 게 요즘은 취미생활이 되다시피 했다.

테크놀러지 시대의 첨단 동굴 같은 영화관에서 최소 한 시간 반 이상 엉덩이를 붙인 채 인형 같이 잘 빠진 얼굴들을 바라보는 걸 심통 맞아 하는 나로선 의외인 동시에 당연한 취미인지 모른다.

언제부턴가 나는 거대한 어둠 속에서 낯선 사람의 검은 등 너머로 비치는 현란한 빛의 환각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도 꾹 참았다가 비디오를 빌려 보거나 인터넷을 뒤져서 혼자 드러누워 보는 게 더 집중도가 높아진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한국영화산업 발전에 백해무익한 존재라고 욕할 사람이 있다면 안심하셔도 괜찮다.

내가 인터넷에서 뒤져 보는 건 오래 전에 봤지만 다시 보기 힘들어진 영화거나 한국에 수입조차 되지 않았거나, 돼봐야 일주일 이상 간판이 걸려있을 가능성이 희박한 것들이니까.

최근에 다시 본 영화는 프랑스 감독 가스파 노에의 문제작(이라고 말들은 많았지만 정작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안다) ‘돌이킬 수 없는’ 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2년 전 여름이었다.

무엇보다 모니카 벨루치의 그리스 여신 같은 얼굴과 그녀의 남편 벵상 카셀의 독특한 아우라를 한 프레임 안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영화 말고도 둘의 동반출연은 매우 잦다)에 이끌려 어느 무더운 오후 비디오를 빌려 봤는데, 러닝셔츠 차림으로 건성건성 보다가 불현듯 온몸이 자지러진 경험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 충격이 사뭇 강렬해 당시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을 방만하게 적어놓기도 했거니와,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과거의 메모를 들춰보니 정말 내가 뭔가 돌이켜선 안 될 것을 돌이키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새삼 등골이 오싹해진다. 날씨가 쌀쌀해진 탓이겠거니 하면서 무심한 척 해보지만, 그럴수록 마음이 더 싸늘하게 오그라드는 걸 속일 수는 없을 듯하다.

이런 소심증의 기저에는 한 선남선녀 커플의 행복한 일상을 일순간에 망가뜨리는 폭력이 단지 특정하고도 불행한 사건(이 영화에서 비극은 여주인공이 강간을 당하는 것에서 시작된다)에 기초하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근원적인 시간의 속성일 거라는 생각이 놓여있다.

‘돌이킬 수 없는’의 구성방식을 따르자면 나는 미래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과거의 어느 행복했던 시절을 거꾸로 거스르면서 점점 지옥의 입구로 가고 있는 게 된다.

그런 생각은 문득 현재의 평온하고도 나른한 시간들에 날 선 가시와 독(毒)이 숨어있는 게 아닐까 하는, 삶 자체의 근본속성과 원리에 대한 섬뜩한 자성으로 이어진다.

현재의 삶은 기나긴 어둠의 어느 지점을 스쳐가며 잠정적으로 빛의 호위를 받는 찰나의 정적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숨통을 조이기도 하고 비감에 빠지게도 하는 이런 난감한 반추 속에서 내 정신은 긴장과 흥분 사이를 성난 시계추 마냥 어지럽게 오가고, 몸은 오래된 밀랍처럼 굳는다.

그런데, 육체의 가장 미시적인 부분까지 민감하게 파고드는 이런 긴장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빠졌을 때 주로 발생한다. 그건 자기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얼이 빠졌다거나 넋이 나갔다고 불리는 모종의 심리적 교착 상태. 그건 공포이기도 하고 황홀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지시하는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순간 내게 ‘돌이킬 수 없는’이란 말은 ‘불가항력’과 이음동의어이다.

동시에 예전에 읽은 소설의 한 구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문학과지성사)에서 읽었던 그 구절은 이렇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체념과 회한,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로부터의 해방과 극복의 뉘앙스가 동시에 포개져있는 듯한 이 문장이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이 애초에 가지 말아야 했을 어떤 길을 미리 가본 자의 잠언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는’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에 따르자면, 그건 다름 아닌 죽은 자의 어법이 된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내 솜털은 가히 바늘 끝같이 치솟고 말았다. 요컨대 ‘돌이킬 수 없는’은 죽음의 편에서 바라본 삶의 시간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은 모든 게 거꾸로다. 시간이 흐를수록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 대개의 영화와는 반대로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전반부의 리듬을 상쇄시키며 뒤로 갈수록 평온해지는 특이한 구성을 갖고 있다.

시간이 역순으로 진행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이틀로 뜨는 원제 ‘Irreversible’도 마법의 거울 속인 양, 역상으로 뒤집어져 있다. 그 모양새가 정말로 ‘돌이킬 꿈도 꾸지 마라’는 듯,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야박하게 되돌아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지옥막?들어가서 천국으로 빠져 나오는 격이랄까.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단테의 ‘신곡’에서 빌린 형식이라지만, ‘돌이킬 수 없는’이 시간을 돌이켜 도달하는 마지막 장면의 평화로움은 그저 액자 속의 그림 같은 느낌밖에 주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다른 어떤 파괴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살 떨리는 예감에 사로잡히게끔 만든다. 지옥에 빠져버린 육체가 반추하는 천국이란 게 어차피 시간의 어느 한 지점에서 정적으로 얼어붙은 다른 지평에 속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 평화로운 ‘그림’은 그러므로 지옥을 더욱 지옥답게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시간의 종착과 시발에 동시에 걸려있는 지옥의 입구로서의 천국. 이인성 식으로 말하자면, 돌이키고 싶은, 그러나 돌이켜지지 않는, 아니 결코 돌이켜서는 안 될 금단의 시간.

시작부터 미친 듯이 날뛰는 카메라 속에 붙들리는 폭력과 호모포비아적인 욕설은 세상에 대한 증오와 능멸을 노골적으로 내뱉는 일종의 직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보기에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불편해진 마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가 그닥 어렵지는 않다. 문제는 영화가 계속 이어지면 질수록 거꾸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되새겨지는 남녀주인공의 행동과 대사들이 모두 파괴의 암시나 예고처럼 여겨지면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는 사실이다.

과거로 돌아갈수록 화면은 안정감을 되찾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360도로 마구 회전하는 롤러코스터라도 타고 있는 듯, 불안과 긴장의 도가니 속으로 역회전하고 만다.

‘행복했던’ 시절의 벵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의 모습은, 이미 그 파괴된 모습을 미리 보았음에도 불구하고(또는, 미리 보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 마련인 실제 시간 속에 투영되면서 더더욱 급강하한 시간 속의 미궁을 바라보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 미궁은 모든 파괴가 이미 진행된 상태에서 우리가 거꾸로 헤집고 들어가 발견하는 시간의 얼굴, 미래라는 거울 속에 담겨있었던 우리의 과거나 다름없다. 그것은 마치 마주 본 거울 속에서 자신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 마냥 끔찍하다.

‘돌이킬 수 없는’은 ‘돌이킬 수밖에 없는, 그러나 돌이켜지지는 않는’ 인간의 절대적 한계상황에 대한 노골적인 환멸과 자성이 담긴 영화라 할 수 있다. 환멸과 진보와 발전에 대한 불신이 이토록 자기반성적이라니. 이 영화를 보면서 바짝 세워진 솜털들이 마치 제 몸을 찌르는 전갈의 가시처럼 여겨졌던 건 어쩌면 그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번은 꼭 봐야하지만, 두 번은 볼 수 없는 영화’라는 현지 평이 설득력 있게 들렸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일테면 ‘돌이킬 수 없는’은 시간이라는 절대불변의 가치를 돌이킬 수 없다는 불가능성 자체로 파괴적으로 형상화한 영화인 것이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불편하고 섬뜩하지만, 이 잠정적인 나른함과 사고없음의 평온이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평화의 그림으로 기억의 오지에 낡은 거울처럼 쑤셔 박히게 될는지 모른다는 각성을 준다는 점에서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미래란 어쩌면 시간의 결과가 아닌 모든 시간의 시발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다시, 쭈뼛쭈뼛 일어서는 내 피부의 민감한 돌기들을 쓰다듬으며 과거의 내 흔적들을 담고 있을지도 모를 미지의 영화를 찾아 허름한 기억창고 속을 뒤진다. 그게 비록 돌이키자마자 지워지는 오르페우스의 모험에 불과하더라도, 어차피 영화란 기억의 고름들로 현재의 피부를 자극하는 마취제 같은 거니까.

‘돌이킬 수 없는’은 그런 의미에서 마취제인 동시에 각성제이다. 나른하게 마취되는 순간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이 명징한 혼란의 그림들을 나는 조만간 또 보게 될 것만 같다. 이런 내가 소스라치게 무섭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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