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고 힘 없는 사회적 약자도 아닌, 강정구 교수와 같은 사람을 위해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법무부 장관이 사상 초유의 불구속 지휘권을 행사한 정권에 대해 정체를 묻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그것은 색깔론이 아니다. 색깔론이란 주로 권력을 이용해 실제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빨간색을 칠해버리는 수법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스스로 ‘커밍 아웃’을 했다. 이런 사람을 파격적으로 특별 대우한 정권의 이념에 의구심을 갖는 게 어째서 색깔론인가.
지난달 말 실시된 한국일보와 미디어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선 법무장관 지휘권 행사에 대해 64.7%가 부정적 반응을 보였고, 53.9%는 강 교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같은 여론의 흐름 역시 정권에게 대답을 요구할 근거가 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한나라당의 정체성 공세는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외투쟁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해 투쟁하겠다던 박근혜 대표는 지금 겸연쩍다. 당 안팎으로 투쟁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나라당이 아직도 ‘색깔론 집단’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주체의 결함 탓에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반(反) 한나라당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도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17대 총선을 통해 상당한 물갈이가 됐다고는 하지만, 당 주도세력과 풍토는 이전과 큰 변화가 없다. 원내대표, 사무총장, 중앙위의장, 여의도연구소장, 대표비서실장 등 힘을 쓰는 당직자들은 영남 출신에 김영삼, 이회창 총재 때도 잘 나가던 사람들이고, 일부는 군사독재 정권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다. 이념이 문제가 될 땐 정교한 논리적 대응 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무지막지한 매도가 기승을 부린다. 권위주의 시절의 관성이다. 이 또한 반 노무현 정서가 강한 지역출신 의원들에 의해 주도된다.
여권은 한나라당의 이런 약점을 잘 파고든다. 한나라당이 작심을 하고 덤벼도 “구시대적 색깔론”이라는 한마디면 분위기는 금세 썰렁해진다. 오히려 한나라당을 향한 여권의 ‘역(逆) 색깔론’이 더 위력적이다.
이래선 한나라당에 희망이 없다. 누가 뭐래도 이념은 국가운영 철학이자 미래다. 이념을 말할 자격을 빼앗긴 야당은 정권을 가져올 수 없다. 대선은 반사이득이 아닌 미래와 시대 정신을 놓고 겨루는 싸움이다.
한나라당의 주도세력이 바뀌어야 한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중간지대에 있는 의원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나라당은 앞으로도 제대로 된 보수를, 얼치기 좌파의 위험성을 이야기 할 수 없다. 뉴라이트 인사 영입 등 외연 확대도 불가능할 것이다. 현재의 당 구조에서 아무리 건전한 외부 세력이 들어와봐야 보기만 좋은 장식품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임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아래로부터의 치받음이 필요하다. 왜 한나라당에는 구 공화당 등 여당에도 있던 소장파의 ‘정풍(整風)운동’이 일어나지 않는가. 어느 의원이 분석했듯이 ‘책상형’ 의원이 많아서인가, 아니면 금배지를 떼도 돌아갈 곳이 있는 법조계, 학계 출신 의원들의 ‘웰빙’ 분위기 때문인가.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기에 남들보다 과감히 소아(小我)를 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고 했다. 당이 상승국면을 맞고 있는, 그리고 내년 5월 지방선거까지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이 적기다.
유성식 정치부 차장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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