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 전날 밤, 개집 앞에 앉아 외등 불빛으로 제 소설을 읽었어요. 단편을 처음부터 끝까지요. 개는 멀뚱멀뚱하고,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 쳐다보듯 하셨지만…, 제 글을 읽어줄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었거든요.” 강원 평창에서 당근농사 지으며 글 쓰는, 신춘문예 투고 10년 이력의 소설가 김도연(39)씨는 그 해 그 작품(‘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으로 데뷔했다.
또다시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문청(文靑)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다는 이 계절에, 계간 ‘21세기문학’이 ‘등단의 풍경’ 특집을 실었다. 작가 치고 등단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 한 두 토막 없는 이 없을 것이다. ‘문인들이 말하는 나의 문단 데뷔 이야기’이다.
70년 등단한 노향림 시인은 은사였던 김현승 시인과 선배 시인들에 얽힌 추억과 함께 시작(詩作)의 고통을, 시인이 된다는 것의 ‘아늑한 슬픔과 기쁨’을 전했다. “지금도 나는 스승 김현승 선생님께서 한 말씀이 기억 난다. ‘언어 감각 하나는 버리지 말고 잘 살려서 시를 쓰라’는 그 말씀이.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이란 얼마나 고단하고 험난한 일의 연속인가.”
77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송재학 시인은 문학을 하겠다며 휴학계를 내고 사전과 시집, 빈 공책 열 권을 챙겨 든 채 고향으로 숨어 들었던 76년의 이야기를 썼다.
(오전) 사전 읽기- (오후) 낚시하며 ‘관찰’하기 (밤) 일기 쓰기, 습작시를 아궁이에 던져넣고 태우던 일, 민음사 ‘오늘의 시인총서’ 베끼기, 그리고 절망하기. “결국 내 재능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향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다가왔”던 그 이듬해에 그는 등단했다. “하루도 시를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날이 있었을까. 스스로의 시로 황홀한 한나절이 있었을까.”
입시과목에 ‘수학’이 없고, ‘소나기’의 황순원씨가 있고, ‘잘 나가는’ 소설가가 꼭 되어야겠다는 각오가 있어 경희대 국문과에 진학했다는 박남철 시인은 재학시절 쓴 단편소설 이야기와 ‘경희문학회’ 회장을 맡게 된 사연, ‘문학의 밤’ 행사 등에 발표했던 작품이 ‘문학과 지성’에 실려 등단(79년)하게 된 뒷얘기 등을 소개했다. “삶은 눈물이다. 나는 크게 한 번 욺으로써 시인이 되었고 다시 크게 한 번 욺으로써 시인으로서 또다시 깨어났다.”
82년 시 동인지 ‘시운동’으로 데뷔한 이문재 시인은 등단 방식에 대한 자의식과 그 극복의 과정을 전하며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등단 이후라고 썼다. “시인이 되고 나면 세상이 한번 뒤집힐 것 같지만, 세상은 코방귀도 뀌지 않는다.… 어떤 시, 어떤 시인이 되느냐가 관건이다.” 그렇게 시인으로 23년을 산 그의 고백이다. “언제부터인가 ‘시’라고 발음하고 나면 눈이 젖어있다. 고맙고 미안하다. 미안하고 고맙다 시야, 많이 살자, 오래 같이 가자.”
대학 문예창작과 시절 별명이 ‘걸어다니는 잠수함’이었다는 소설가 강영숙씨는 졸업 8년 만에 데뷔하며 ‘잠수’를 끝냈던 그 지난한 사연을, 2000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편혜영씨는 밀레니엄의 그 해 1월1일 광화문 불꽃놀이에 빗대어 등단의 소회와 의미를, 2001년 등단한 백가흠씨는 데뷔 그 해의 일기 형식으로 떠난 사랑과 다가온 소설 이야기를 썼다.
소설가 박덕규(단국대 문창)씨는 책으로 곧장 독자와 대면하는 구미와 신춘문예나 신인상 등에 의한 우리의 등단제도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대비하고 그 장단점을 소개했다. “(신춘문예 등 관행 탓에) 독자와 싸움하는 훈련이 안 돼 있어 ‘한국문학 작품은 대체로 독자들이 재미없어 한다’는 세평”도 있고, “(그래도 그 덕에) 상업주의를 넘어서서 아직 ‘순수 문단’이 이만큼이나 존재”한다는 평가도 있다는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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