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지음ㆍ이한음 옮김까치 발행ㆍ3만2,000원
진화를 다룬 보통의 책을 생각한다면 이 책 ‘조상 이야기’ 역시 마지막 600쪽 정도에서 거꾸로 읽어나가는 것이 정상이다. 생물이 오랜 시간 조금씩 변해간다는 뜻에도 사실 그게 충실하다. 첫 장에 현대사를 쓰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 장에서 선사시대를 다루는 역사책은 보기 힘들지 않은가.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의 기원(그는 ‘유전의 기원’이 더 정확한 말이라고 본다)을 설명하는 이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정반대의 방식을 구사한다. 그는 현생 인류에서 시작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저자가 ‘랑데부’라고 부르는 종들의 분화 지점을 찾아 나갔다. 이런 방식으로 경외로운 생명의 기원을 찾는 순례의 길을 떠나 인류는 차례차례 가까운 종들과 합류해 지구 최초의 생물에까지 이른다.
왜 이런 방식을 택한 걸까? 그는 진화에 목적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설명하는 다수의 책이 종착역에 인간을 세워두고 생명이 좀더 우수한 종으로 변해왔다는 가치수반적 진보관을 채택한다. 하지만 저자는 생명의 다양성을 폭발이 아닌 수렴으로, 생물의 진화를 단지 적응의 양상으로 바라본다. 그것도 집을 지으면서 차곡차곡 벽돌을 한 장씩 올리는 식이 아니라, 어느 순간 그 모든 벽돌이 와그르르 무너지기도 하는(도킨스는 그래서 진화학자들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인류 다음 세대의 모습은 ‘완전한 멸종’일 뿐이라고 한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는 적응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 역시 진화의 길을 가고 있는 다양한 생물 종들 중 하나일 뿐이다.
‘랑데부 0’이 인류의 조상이라면, ‘랑데부 1’은 인간과 침팬지가 함께 순례의 길을 떠나는 출발점이다. 몇 번의 랑데부를 거친 포유류는 이제 서서히 공룡을 향해 나아간다. 공룡의 조상에는 페름기 대멸절로 생물의 대부분이 사라진 땅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파충류들이 있다. 대멸절 이전에 생물은 바다에서 나와 육지를 정복했을 것이다. 그들이 육지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식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독이 되었을 산소를 방출함으로써 탄소를 이용하는 생물 체계를 발전시켰다. 균류와 다세포 생물을 지나 우리는 최초로 핵을 가진 진핵생물을 만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명의 기원, 바다에서 발생한 세균들과 합류한다. 놀랍게도 이런 랑데부의 차수는 고작 40번에 불과하다. 랑데부 0에서 출발하여 랑데부 39에 도착하면 우리는 모든 생물의 조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유감없이 선보인 대로 도킨스는 진화의 과정을 역추적하는 이 책에서도 유전자와 유전자 가계도를 십분 활용한다. ‘우리가 최근 인류 역사에 적용한 방법은 나머지 생물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그는 이 ‘생명의 보편적인 특징’을 활용해 9,000년 전 멕시코에서 옥수수가 작물이 될 무렵에 새겨진 흔적을, 유럽의 동식물들이 빙하기가 닥치면서 온대 종들은 유럽 남부의 피난처로 내몰리고, 빙하기가 물러가자 한대 종들은 산맥에 고립된 상황을 찾는다. 그가 단지 유전자만으로 이런 순례의 이정표를 삼는 건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올라갈수록 그런 방식으로 진화의 계보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직계 조상을 중시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선입견’을 충족하는 화석 등 고인류학과 동물형태학의 여러 이론들도 다양하게 참고한다.
담고 있는 정보의 양만 따진다면 백과사전이라 불러도 좋겠지만 그 정도로 이 책을 평가절하 할 수는 없다. 원시 인류부터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의 공통 조상 원핵생물에 이르는 40억 년 동안에 등장하는 생물의 특징과 진화의 요인을 최신의 연구 성과와 다양한 이론을 꿰어 멋진 글 솜씨로 들려주기 때문이다. 책 말미에서 도킨스는 겸손하게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정당화하고 싶다면, 이 책의 아무 데나 펼쳐보라. 내게 그 말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내 책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경외심이다.’ 나는 그가 자부심도 가질만하다고 생각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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