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해 한반도를 강점할 결정적인 계기로 삼은 을사늑약(乙巳勒約ㆍ을사오조약)이 17일로 체결 100년을 맞는다.
덕수궁 중명전에서 한규설 등 일부 대신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적(五賊)’을 앞세워 강제한 이 늑약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곧 열릴 독립기념관 전시회 자료로 되돌아본다.
독립기념관이 15일부터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을사늑약 100년, 풀어야 할 매듭’을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연다.
12월11일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는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밝히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전시회에서는 당시 대한제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은 9개 나라에 보낸 고종의 친서 등 을사늑약 관련 자료들이 선보여 눈길을 끈다.
서울대 김기석 교수(교육학)가 제공한 이 자료들에서 고종 황제는 ‘1905년 11월 18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것으로 알려진 을사오조약이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고 친서를 통해 밝혔다. 이때가 1906년 6월 22일이다.
고종은 이날 자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밀사’인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를 특별위원으로 임명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및 중국의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전달하도록 밀지를 내렸다.
하지만 제국주의 팽창의 야욕을 불태우던 여러 나라들에게서 힘을 빌리기는 어려웠다.
특히 1905년 7월 29일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필리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양해를 얻고,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용인한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알선조항’(상호방위조약)을 무시하고 대한제국을 ‘배신’했으며, 이후 고종의 무효화 호소에도 갖은 핑계를 대며 등을 돌렸다.
이번 전시에서 을사늑약을 전후한 사정을 담은 자료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립기념관은 ‘흔들리는 조선’ ‘1905년 11월17일 중명전’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다’ ‘을사늑약의 주연과 조연’ ‘꺼져가는 불꽃’ ‘풀어야 할 매듭’ 등 8부로 나눠 20세기 조선의 역사가 얼마나 피눈물 나는 망국으로 시작되었는지를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일제 식민통치 자료와 을사조약 체결과정을 담은 삽화 등을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전시회 개막에 앞서 오전 10시30분부터 독립공원 내 독립관 강당에서 학술강연회도 연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을사늑약 무효 선언과 이후의 과제’를,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메이지 일본의 한국 침략사’를 강연하고, 북한의 천도교 청우당 강철원 부위원장이 보내온 ‘1905년과 2005년’이라는 글이 소개된다. 이어 이애주 서울대 교수가 ‘영령맞이 진혼굿춤’을, 안숙선 명창이 ‘안중근 열사가’를 공연한다.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김범수 기자 bskim@hk.co.kr
■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을사늑약은 과거완료형이 아닙니다. 아직 매듭지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현재진행의 사건입니다.”
김삼웅(62) 독립기념관장은 올해 2월 정부 기관장의 자격으로 을사늑약의 무효를 공식으로 선언했다.
프랑스의 국제법학자 프란시스 레이가 1906년 초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라는 논문으로 이 ‘조약’의 불법성을 논한 이후 유엔 등 국제사회가 한결같이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작 우리 정부 기관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어 7월에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에서도 남북 공동으로 이 늑약의 무효를 확인했다.
새삼스러울지도 모르겠으나, 김 관장이 굳이 이런 역할을 맡고 나선 이유가 있다.
“한반도 주변의 4강 각축구도가 구한말 상황과 비슷하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을사늑약의 배경과 국제역학관계, 무효의 이유와 무효 선언 이후의 과제를 점검해야 합니다.”
“을사늑약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과 식민화 과정이 일본을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가 야합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그는 미국 예일대 폴 케네디 교수의 말을 인용해 미국 등 강대국들의 지금 행태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케네디 교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퇴거하는 대신 체첸 사태의 묵인을 요청했다는 미국과 러시아의 밀약설, 또 북한의 핵문제와 대만의 독립문제를 연관해 미국과 중국의 밀약설을 제기했다.
김 관장은 을사늑약에서 비롯했으나 매듭짓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일로 간도 문제를 들었다.
“설사 을사늑약을 정상적인 조약으로 인정하더라도 일본이 청과 간도협약으로 한반도 넓이에 맞먹는 간도 땅을 넘겨줄 권한까지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면 “학계나 민간에서 무효화를 선언하는 등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김 관장은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과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을 적극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1888년 사들였던 워싱턴의 상주공사관 건물의 ‘원상회복’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2만5,000달러에 사들였던 이 건물은 1910년 국치일에 주미 일본대사의 손을 거쳐 홀튼이라는 미국인에게 단돈 10달러에 매각되고 말았다.
덧붙여 그는 지금도 국사교과서에서 쓰고 있는 ‘을사5조약’이라고 표현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제로 맺은 조약은 ‘늑약’이라고 불러야 마땅합니다. 내년 초에 역사용어 왜곡 심포지엄을 열고 그 결과물을 모아 교육부 등에 건의할 계획입니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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