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 재료 하나에 엄숙한 마음이 들어본 적 있는지?
나는 '알' 종류를 볼 때면 다소 숙연해 진다. 알이라는 것이 생명의 시작이요 새 세상의 탄생인데, 그 싹을 똑 꺾어 한 입에 삼키게 될 때에는 잠시나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일전에 '미식'을 이야기 하면서 언급했었지만, 그런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맛이 있을 때에는 그 맛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간장 게장 하나를 상위에 올려보라. 등을 딱 뜯었을 때 알이 가득 찬 모양이라면, 혀 뿌리에 침 아니 고일 사람 어디 있겠나?
선명한 오렌지 색의 알이 잘 익은 간장의 양념이 배어 반짝거리며 빛날 때, 그 때는 따끈한 밥 한 공기만 있어도 임금님 진지상이 부럽지 않다. 식당차가 있던 옛날 기차에서는 '홍익회' 딱지가 찍힌 삶은 계란을 먹을 수 있었다. '통일호' 처럼 지루한 차편이라면 덜커덩거리는 레일 소리에 맞추듯 계란 두 개 정도는 껍질을 매끈하게 벗긴다. 그것을 오믈대며 지루함을 달래는 수 밖에 없었으니까.
요즘에는 찜질방에서 맥반석에 구운 달걀이 인기다. 땀을 쪽 빼고 난 후의 허기에는 고소한 달걀보다 제격은 없을 정도다. 아무튼 간장 게장에서 긁어낸 알도, 기차 간 삶은 달걀도, 맛이 참 좋아서 남녀노소가 다 잘 먹는다.
♥ 물의 알
흑해에서 건져 올린 철갑상어는 비싸다. 이 상어의, '캐비아(caviar)'라 불리는 알 때문이다. 거위 간, 송로 버섯과 함께 세계 3대 미식 재료로 꼽히는 캐비아는 그 굵기와 맛의 농도에 따라 분류된다.
그 가운데 가장 고급으로 치는 것은 알이 굵은 벨루가(beluga) 캐비아인데, 마치 다이아몬드의 캐럿 얘기하듯 그 직경을 따진다. 녹두 알만한 크기의 벨루가 캐비아는 까맣고 윤기가 나서, 예쁘게 생긴 꼬마의 눈동자 같다. 그 맛과 향기가 야생적이라 그냥 먹기는 좀 그렇고, 비린 내를 눌러주는 신맛을 더해야 한다.
레몬이나 사우어 크림(요거트와 비슷한 발효 크림)을 곁들여 먹는 것이 그 이유인데, 전통적으로 러시아 사람들은 '블리니'라 불리는 작은 호밀 케이크에 사우어 크림을 바르고 캐비아를 얹어 먹는다.
그 풍요로운 맛을 받쳐주는 유일한 음료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보드카라고 하는데,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와 같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얘기들이다. 요즘은 캐비아의 유일한 단점, 특고가(特高價) 라는 것을 의식하여 검게 천연 물감을 들인 열빙어 알이나 오렌지 색 연어 알, 날치 알 등도 일본 캐비아(Japanese caviar) 같은 이름으로 대체 사용된다.
특히나 알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씹을 때 톡하고 터지는 연어 알을 즐기는 까닭에, 초밥으로 덮밥으로 전채 요리로 두루 먹는다. 캐비아에 비하면 가격이 낮지만, 여전히 서민적인 음식은 아니다. 구입 할 때에는 요리법을 미리 염두에 두고 한 알 한 알 아껴가며 다루는 것이 좋겠다.
강판에 갈아낸 마에 연어 알을 조금 얹고 간장과 고추냉이 약간으로 간을 맞추면 입맛 도는 식전 요리가 되는데, 특히 소화를 돕는 마와 고급스러운 미감(味感)의 연어 알이 만나서 입안을 감동시킨다. 얼마 전 읽은 어느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즐겨 먹는 음식이 '맨 밥에 연어 알을 듬뿍 얹고 김 가루와 고추냉이, 참기름을 살짝 친' 것이었기에 따라 해보니 맛있다.
연어 알보다 가격이 저렴한 날치 알은 볶음 국수와 같이 익힌 음식에 넣어도 오도독 씹는 맛이 좋고, 김밥이나 유부 초밥을 쌀 때에 조금 넣어도 색다르게 즐길 수 있어 실용적이다.
♥ 땅의 알
물에서 나는 알 외에도 오리 알이나 타조 알, 닭의 알이나 메추리알과 같이 뭍에서 나는 알들도 있다. 중국 요리 '송화단'은 나뭇재나 찻잎, 소금과 물 혹은 석화를 빻아 만든 반죽을 항아리에 담고 오리 알을 넣어 몇 달을 삭힌 것이다.
완성된 송화단의 껍질을 까보면 소나무 껍질을 닮은 무늬가 보인다 하여 송화(松花)라 불리는데, 독특한 맛을 자랑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만만한 메추리알은 삶아서 껍질을 깐 다음 장조림 해두면 반찬으로 제격. 특히 도시락을 쌀 때에 편리하다.
햄, 피망, 토마토를 버섯과 볶다가 토마토소스와 바질로 맛을 내어 토스트 위에 얹고, 살짝 익혀서 소금, 후추만 살짝 뿌린 메추리알을 얹으면 속 든든한 간식이 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피를 다 가진 어느 친구가 가르쳐 준 메뉴로, 그 친구는 피자에도 계란을 하나 깨서 얹어 먹곤 했다.
나의 하루 식단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계란인데, 특히 그 생명력 넘치는 샛노란 색감은 지친 아침에 활기를 준다. 아침에 먹지 못한 날은 점심때 들른 백반 집에서 보충하는데, 단골 밥집에서 계란 후라이 하나를 서비스 받는 날이면 큰 덤을 얻은 듯 기분이 좋다.
'알'은 생명의 시작이고, 또 알을 먹음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연장되니 참으로 신성한 존재다. 알은 곧 진리요 생명이라고까지 할 마음은 없다 치더라도, 신이 내린 '알의 근원'이 돈으로 사고 팔릴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 두렵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텐데.
푸드 채널 ‘레드 쿡 다이어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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